지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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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명지동

낙동강 하구 삼각주의 최남단에 위치한 명지동은 최대의 대파 및 해태(김)생산지로서 예전에는 소금 만들기에 적합하여 '명지소금'이 유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섬전체가 온통 갈대밭이어서 갈대를 이용한 '노초수공품'이 특산물이었다. 토착민이 85%이며 단일 초등학교의 선후배 관계로 지역 연대의식이 강하다. 「명지도(鳴旨島)」라는 지명의 유래는 자연재해나 천재지변이 있을 때마다 섬의 어딘가에 서 먼저 변(變)을 예고하는 북소리, 종소리 같은 소리가 섬 전체에 울러 퍼졌다는 데서 '명 지'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명지동 지명유래
동 명자연마을명유 래
명지동진목 (眞木) 진목리는 옛날에 참나무가 많이 우거져 숲을 이루고 있었으므로 진목마을 이름이 유래 되었으며 참나무정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진목마을은 진목리의 본부락으로 경등마을과 사취등마을의 중간에 위치한 큰부락이다.
신포 (新浦) 김해군에 소속되었을 때 명지면 진목리는 행정마을로 진목,사취,순아도,경등마을이 있었다.
새동네 9통은 1989년 새로이 생긴 도시화의 상가마을이다 원래 이 지대는 갈대밭이었는데 하구둑을 만들면서 수자원공사에서 매립을 한곳으로 신포3통 일부 주민이 이주 하였다. 이곳의 세대수는 약 100호이상이고 개발제한구역 밖이 되어 큰 건물이 신축되어 레저시설등 소규모 시가지를 형성하였는데 특히 이곳에는 명지의 명물인 활어횟집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어 많은 미식가들이 찾아들고 있다.
사취등 (沙聚嶝) 낙동강의 모래가 홍수에 의해 쌓여져 모래톱을 이룬데서 사취등이라는 마을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지금은 큰 마을이 되어 있다. 해척마을과 더불어 명지동에서 가장 높은 지대인 이 마을에는 청량사와 용평사 절이 위치하고 있다.
경등 (鯨嶝) 진목리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고래등처럼 생겼다 하여 경등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옛, 이 마을동쪽에 진목염전이 있었고 갈대만 우거진 땅을 개간하여 농경지로 조성하였다. 명지지역에서 순아도마을과 더불어 마을의 형성역사가 60년 정도 밖에 안되다는 비교적 늦게 생긴 마을이다.
순아 (順牙) 진목리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순아마을은 현재 1,2,3구로 나뉘어 있다. 1구의 서남쪽이 2구이고 사취등의 서편이 3구이다. 옛날 이 일대는 무성한 갈밭이었고 김해군 가락면 제도리 남쪽에 위치한 포구라고 해서 남대포라고 불럿다 이포구는 현재 순아2구 지역으로서 일제말기에 이르러 갈밭을 개간하여 농경지로 조성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영강 (永康) 중리의 동편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어 바다로 나가는 길목인 이 마을은 옛날에는 동문이라고도 하였고 광복 후에는 영구히 평안하게 해 달라는 뜻에서 영강마을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마을의 형성 역사는 250년 쯤으로 짐작되며 동사무소, 명지초등학교, 파출소 등 각 기관이 마을에 위치하고 있어 명지의 행정 중심마을이다.
중리 (中里) 김해군 명지면 때에 영강, 해척, 중리마을이 행정상 모두 중리에 소속되었는데, 이 마을은 명지에서 제일 먼저 취락이 형성되었던 곳이다.
해척 (海尺) 김해군 명지면 때의 중리에 소속된 자연부락으로 중리 서편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다. 옛날에는 갯마라고 불렀는데 이는 갯마을이란 뜻이다.
동리 (東里) 동리는 동남쪽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어 옛날부터 어업에 종사하는 부락민이 많은 편이었다. 현재도 주민의 절반 가량은 어업에 종사하고 있으나 낙동강 하구둑이 건설된 후에는 비교적 부진한 편이다. 동리의 남쪽은 지대가 높고 묘지가 많아 묘등이라고 했으나 이제 묘는 이장되어 밭으로 변하였다.
진동 (鎭東) 진동마을은 낙동강 삼각주평야에서 제일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낙동강하류의 모래가 퇴적하여 이루어진 지역으로 바다에 접하고 있다. 동쪽에는 동강염전이 있었고, 서쪽에는 해티밭 염전의 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이 일대가 염전지대인 것으로 추정된다.
조동 (助東) 조동리의 본 마을이며 남쪽은 앞들, 북쪽은 뒷들이라고 한다. 조동과 전등사이에는 옛 사람들의 묘가 수백기인 공동묘지가 있었으나 1978년에 옮겨 정리하여 전답을 일구었다. 또 이곳에는 옛날 염전터도 있었다.
전등 (田嶝) 염전이 있는 등으로서 밭등이란 마을이름이 붙여졌는데, 모래가 쌓여 작은비탈을 이루고 언덕을 개간하여 밭을 일구어 농경을 시작하게 되어 밭등으로 되었다는 설이 있다. 일제시대에는 3~4가구가 살고 있었으나 광복 후 각처 영세노무자들이 이 곳에 정착하여 부락을 형성하였다.
평성 (平城) 명지도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방조제로서 해수를 막게 되어 평안한 성과 같이 안전지대로 되었기 때무에 평성리란 부락이름이 붙여졌다. 또한 태평등이라고도 하였는데 이 이름도 염전경영으로 평화롭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예전에는 서리라고도 하였는데 명지면 사무소에서 서편에 위치하였기 때문이다.
상신 (上新) 옛날 신전리의 중심마을로서 북쪽에 조동리와 접하고 있으며 방조제가 둘러져 있는 마을이다. 이마을에도 조선시대 염전이 많았으나 지금은 파농사와 고등소채 재배가 주업이 되고 있다. 특히 연례행사로 65세 이상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는 경로잔치와 효도관광을 실시하여 연장자를 공경하는 미풍양속이 살아있고 경제적인 격차 없이 안정된 생활로 넓은 바다를 보고며 사는 마을이다.
중신 (中新) 김해군 명지면때에 신전리에서는 제일 큰 부락이었으며, 조선조 시대부터 일제시대까지 염전이 많고 또 제염량이 많아 이곳 부락민은 낙동강 상류 경북 현풍지방까지 올라가 식량과 교환해 왔다고 한다.
하신 (下新) 명지동의 남서쪽 최남단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전리에 소속되었던 자연부락이다. 동쪽에 홍처사 염전, 남쪽에 박진사 염전의 터가 있었는데 이것이 명지제염소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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