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월사지흥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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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사지흥국사

명월사지(明月寺址) (강서구지, 부산지명총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명월사(明月寺)는 명월산에 있었다고 하고, 헌종 34년(1708) 승(僧)증원(證元)이 천한 <김해명월사사적비>에 명월사 내력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명월사는 임진왜란때 불타버렸는데, 광해군 10년(1618)에 중건하였고, 그 뒤 또 다시중수(重修)할 때 「건강원년갑신삼월남색(健康元年甲申 三月藍色)」이라고 새겨진 기와장이 무너진 담장 아래서 발견되었는데, 건강원년은 수로왕 103년(144)이 되며 서역불교(西域佛敎)가 장유화상(長遊和尙)에 의해서 일찍이 이 땅에 전래된 것을 입증한다고 한다.

흥국사 경내에 있는 명월사 사적비문(史蹟碑文)을 보면, 가락국 수로왕이 높은 산길 아래서 만전(滿殿)을 베풀어 허왕후를 맞이하였으며, 익일(翼日)에 궁으로 돌아갈 때에 허왕후가 입었던 비단바지를 벗어서 산신(山神)께 바쳤다고 전해오고 있다.

사왕석(蛇王石)
사왕석 사진

명월사 옛터로 보는 자리에 1956년 흥국사의 칠성각을 건립할 때 화강암으로 만든 석탑면석(石塔面石) 1개와 다른 석제품 조각 1점이 나왔다.

이 석탑면석에는 중앙의 석불좌상 양쪽에 뱀 한 마리씩 양각되어 마멸이 심하기는 하지만 조각수법은 꽤 우수하다. 면석의 크기는 폭 74cm, 높이 52cm, 두께 15cm이다. 불상과 뱀이 함께 조각되어 있는 것이 특이한 형상인데 일부에서는 이 조각을 삼매경에 잠긴 불타를 양쪽에서 한 마리씩의 뱀이 서로 감고 있는 형상에서 인도의 야요오디아에서 볼 수 있는 「무칠리디아」라는 사왕(蛇王) 같으며 이 사왕이 열반속에 잠겨 있는 불타를 보호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이곳을 인도 아유타국과 가락국의 문화교류를 입증하는 자료가 되며 우리나라의 남방불교계 유입의 근거가 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명월사 사왕석은 현재 흥국사에 보관되고 있다.

흥국사(興國寺, 강서구지, 부산지명총람)
흥국사 사진

지사동 명동(明洞)마을 산 498번지에 흥국사가 있다. 이 흥국사 자리를 명월사(明月寺) 옛터라 한다.

현재의 흥국사는 1956년 중건하였다. 경내에는 「가락국태조왕영후유허비(駕洛國太祖王迎后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오늘날의 흥국사의 주변일대가 옛날의 명월사지(明月寺址)였다고 하나 지금은 옛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흥국사의 칠성각을 건립할 때 출토된 화강암제의 석탑면석(石塔面石) 1개와 다른 석제품조각 1점이 보관되어 있다. 그 석탑면석을 명월사 사왕석(蛇王石)이라 일컫고 있다. 1983년 1월 이곳에서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 1구가 출토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흥국사 주소 : 강서구 허왕후길 182
명월사(明月寺)의 흥망(강서구지)
명월사 사진

가락국 수로왕이 허왕후를 부인당(웅동면 용원리)에서 맞이하여 여기까지 와서 여러 신하들을 물리치고 단 둘이 산으로 올라가 산골짜기에서 하룻밤을 함께 지냈다. 왕은 나중에 달이 밝게 비춰주던 이 산을 명월산(明月山)이라 하고 암자에 달빛이 비추었던 그날 밤의 일을 생각하여 명월사(明月寺)라고 명명하였다. 왕은 또 명월사를 크게 증축케하고 앞들에 있는 토지를 많이 하사하였다.

그 때문에 절이 크게 흥성하였고, 승려도 삼백여명이나 되었으며 그 절에 소속한 암자도 여럿이 있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수도(김해읍)로 가는 길이 그 절앞으로 났으므로 하루에 수백 명의 손이 그 절을 오고가곤했다. 절에서는 나중에 손들을 맞는 것이 귀찮아서 행상과 모양이 좀 이상한 사람만 보면 대접을 후히 하고 "어떻게 하면 이 절에 손님이 안 오시겠습니까? 좀 가르쳐 주시오"하고 물었다.

어느날 행색이 표표한 젊은 과객이 이 절에 들자, 승려들은 그를 찾아와 역시 어떻게 하면 손이 안 오겠느냐고 물었다. 젊은 과객은 중의 위 아래를 훑어보더니 "그렇게 손님이 오는 것이 귀찮거든 이 절에 쑥 내민 산봉우리를 끊어놓으면 다시는 손님이 안올 것이오"하고 일러주고 홀연히 가버렸다.

승려들은 이튿날 곧 일꾼을 시켜서 산봉우리를 끊어버렸다. 그랬더니 그 뒤부터는 정말 손님이 오지 않고 날마다 승려가 몇 명씩 죽어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웃절에서 죽은 승려는 웃절 근처에서 화장하고 아랫절에서 죽은 승려는 아랫절에서 화장을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 화장터를 가리켜 웃영장골, 아래영장골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터에는 불에 그슬린 돌들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한다. 좋은 유래를 가진 명월산의 명월사는 이리하여 멸망해 버렸고 지금은 그 자리에 빈터만 남고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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