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전의 역사 ‘신호도’
염전의 역사 ‘신호도’
↑ 1950년대 신호초등학교 학생들의 가을소풍 전경
↑ 2000년대 르노삼성자동차공장과 남쪽 해안으로 집단이주한 신호마을 전경
남해 바다가 펼쳐지는 신호동은 갯가 염전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은 동쪽 및 남쪽 의 막개 염전, 북쪽의 북매 염전등이 번성한 것으로 전해 내려 오고 있다.
신호라는 지명은 원래 바다 가운데 새로 생 긴 신도(新島)에서 유래되었다.
한때 바짓가랑이와 신발에 묻은 갯벌만 봐도 금새 신도(新島) 사람이라는 것이 표가 날 정도였다고 한다.
1967년 녹산간척사업으로 육지를 잇는 제방이 생겨났고, 삼등분화 되어 있던 이곳 지형이 상전벽해의 옥토로 변모했다.
1425년 「세종실록」에는 ‘경상도 김해에 염 장관을 두고 순찰토록하며 살펴보도록 하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염전농사를 짓기 위해 갯벌을 개간하고 텃밭을 일구면서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염전업은 자취를 감추었고, 1993년 신호공단이 조성되면서 옛 마을의 흔적은 찾을 길 없다.
해태(김)양식과 틈틈이 고기 잡으러 떠다니는 FRP동력선만이 바닷물 가르며 이곳 사람 들의 숱한 애환들을 달래고 있다.
현재 삼성자동차 공장 완공, 신호공단 조성 등으로 인해 이주단지로 집단이주하여 새로운 주거환경을 형성하고 있으며, 인근 주변지역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등 도시화가 가장 왕성하게 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