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지도(명지동) ‘전오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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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도(명지동) ‘전오염’

1940년대 명지 전오염 생산 모습 사진

↑ 1940년대 바닷물을 가열하여 소금 결정체를 만들어내는 명지 전오염 생산 모습

1970년대 대마등 사진

↑ 1970년대 대마등 모습. 낙동강 하구 염전과 새들의 보금자리이며, 한때 대파, 시금치, 무 등의 농작물 경작지이기도 하였다.

2000년대 명지 염전지대 모습 사진

↑ 2000년대 명지 염전지대 모습

명지지구 개발사업 전경 사진

↑ 2013년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 명지지구 개발사업이 진행 중인 명지 염전지대 전경

명지동의 역사는 제염의 역사이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전국 8도 해안의 염분이 332개소에서 1,313개소에 육박하였 고, 고려시대에 비하여 그 수가 매우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소금은 오곡(五穀) 다음가는 중요한 것이라고 했다.

명지도 제염의 경우, 조선초기에는 백성들 이 생산 판매하다가 태조 때 관유가 되었다. 관유가 되고부터 소금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쌀과 옷감을 대신 주었고, 이것이 오늘날 의 전매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소금의 관유는 중종 때 이르러 사유화되었다가 다시 영조 때 관이 염전을 점유하는 등 그 후 몇 차례에 걸쳐 점유권이 바뀌었다. 또, 관리를 맡은 이들이 갖가지 부조리를 저질러 물의를 일으키는 등 말썽이 자주 빚어지자 말썽 많던 공염제도는 순조 19년(1819)에 완전 폐지되고 말았다.

명지도의 제염 생산 활동은 일제강점기 1940년까지 이어져 오다가 휴업을 하고 말았는데 그때까지 이곳에서 연간 생산량이 60kg 무게로 10만 가마였다고 한다.

광복 후에는 명지 17명, 신호 7명, 녹산 9명 등 총33명이 발기하여 염장을 복구하여 연간 20만 가마를 생산하기도 하였으나 계속되는 경제성 악화로 제염생산을 중단하는 곳이 많았고, 박석곤·엄명섭·박소룡 등은 1960년대까지 제염생산을 하다가 중단하였다.

담당자
문화체육과 / 문화관광계 (051-970-4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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