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 ‘노적봉’
그때 그 시절 ‘노적봉’
↑ 1930년대 낙동강 일천식 공사와 녹산수문 건설 시찰단 전경
↑ 1950년대 녹산수문 전경
↑ 1950년대 녹산수문과 성산마을 포구 전경
낙동강 물길 따라 1천 3백리 길을 마감하며, 목쉰 갈매기 몇 노니는 곳에 노적봉이 있다.
1934년 녹산수문이 건설되고부터 나룻배도 사공도 찾아볼 수 없어졌으나 국도 2호선 부산~진해를 잇는 관문 역할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강과 바다의 물막이가 되는 노적봉을 중심 으로 형성된 성산마을의 유래는 정확히 알 수 가 없다.
『김해읍지』는 순조 32년(1832년) 이곳을 녹도(菉島)로 표기하고 있다. 또 김해에서 20년 간 귀향살이 한 이학규(李學逵)의 금관죽지사 (金官竹枝祠)에도 녹도의 이름이 나타나 있다.
녹도(菉島)은 이순신장군 난중일기에 ‘노적봉’으로 기록될 정도로 민족사의 애환을 간직 한 채 그 긴 세월동안 바다속의 아픔이 되고 있다.
1930년대에 이르러 낙동강 일천식 공사가 시작되고부터 사람의 왕래가 많았고, 이후 1950년대 개설된 녹산동 5일장은 부산~진해 를 잇는 관문으로서 서낙동강과 남해 바다가 맞닿는 요충지라는 배경에 힘입어 김해 일대 에 형성된 재래시장 중 김해읍장 다음으로 상권이 크게 번성하였다.
녹산수문 북쪽산기슭 주변은 ‘대흥관’ ‘부산관’ 등 객주업이 번성하였고, 남쪽 해변은 막걸리 주정공장, 어전, 동쪽 시장 중심부는 목재소, 소전, 양철 땜쟁이, 약장수, 옹기전 등 이 1970년대 말까지 열렸다.
↑ 2000년대 성산마을 포구 전경
↑ 2010년대 녹산수문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