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가 있는 ‘가락’
풍류가 있는 ‘가락’
↑ 1960년대 가락중학교와 서낙동강 전경
↑ 죽도모연(竹島暮煙) 오봉산, 1973년 강동교가 놓여진 옛 해창나루 풍광
가락은 조선시대 서낙동강 수로교통의 요충지였다.
임진왜란 후 해창나루에는 대변청(待變廳)을 설치, 황지 5호 전함을 배속시켰다.
효종 원년(1649)에는 세곡을 수납하는 해창(海倉)과 화약과 군기고 등을 두고 병사들까 지 주둔한 요새항(要塞港)이었다.
녹산 형산진나루, 김해 곤지나루에서 출발 한 황포돛배는 가락 해창나루에서 짐을 부렸다. 한때 가락5일장은 장꾼들로 북적거리며 번성하였다.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 5일장 행상인들의 왕래가 잦아 이 일대는 ‘강남여관’, ‘낙동여관’ 등의 숙박업과 술집인 '오봉관' 등이 크게 성업하여 팔도의 내로라 하는 사람은 가락과 인연 맺어 풍류의 멋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질박한 삶의 냄새가 물씬 베어있는 곳이다.
또 이곳에서 천하의 한량(閑良)으로 이름났던 김성찬, 조장수는 오광대 발상지 합천율 지장터를 드나들면서 그곳의 오광대 가면극을 전수받아 가락동 죽림마을 해창나루에서 최초로 오광대 연희를 한 것이 가락오광대 발상지가 되었다.
1973년 강동동을 잇는 다리가 가설되고부터 옛 나루터의 정취는 완전히 사라졌고, 2007년 가락~김해간 도로 확장공사로 인해 급변한 환경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 2000년대 변화된 모습
↑ 1920년대 최초로 연희된 가락오광대
↑ 가락오광대 발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