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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332 호 | 기사입력 [2023-05-24] | 작성자 : 강서구보

강서향토사-고려청자 무덤의 비밀6

가야문화의 왜국전파

일본은 가야를 고대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환상의 나라로 불렀다. 3~6세기 경 가야는 크게 번창하여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으며 왜국과 깊은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었다. 가야의 여러 소국이 자리한 낙동강 하류 지역은 왜국과 가까워 일찍부터 이들과 교류가 이어졌다.

가야국의 선진 문물이 왜국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가 고대 일본의 생활사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6세기경에는 왜의 문물이 역()으로 남해안의 주요 해상교통로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김해대성동 고분군에서는 방패를 비롯해 화살촉 등 왜국 산 물품이 출토되고 고령, 고성 지방에서도 왜국에서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갑옷과 투구가 출토되었으며 규슈지역에서 발견되는 것과 유사한 돌방무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가장 많은 왜국의 유물은 일상생활 용기인 적갈색 계통의 하지키(土師器)토기와 흑 청색을 띤 스에키(須惠器)토기였다. 스에키는 가야토기의 영향을 받아 5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생산된 단단한 재질의 도질(陶質)토기를 말한다. 이는 가야의 지도층을 비롯한 다양한 계층의 여러 집단이 왜와 교류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도래인이 전한 기술

섬나라인 일본은 외부로부터 사람이 건너 와야 새로운 문물과 기술이 발전하는 환경이다. 고대 한반도나 중국에서 왜국으로 이주해온 사람을 그들은 도래 인(到來人:바다를 건너 들어온 외부 사람)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전파하여 일본 고대국가 체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도래인들은 교역을 위해 단기간 거주하기도 하고 정착을 위해 이주하기 도하였다.

규슈를 비롯한 일본 각지에서 도래인들의 거주 흔적을 찾을 수 있지만 후쿠오카현 니시신마치(西新町)유적에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토기뿐만 아니라 온돌과 부뚜막을 갖춘 움집이 발굴되었다.

부뚜막에서 발굴된 찜요리 기구인 바닥에 구멍이 뚫린 시루는 가야인 특유의 조리기구인데 일본열도 전체로 번져나가 왜국의 식생활문화에 큰 변화를 일으킨 도기였다.

 

가야토기와 스에키(須惠器)

가야 여러지역에서 왜국으로 건너간 이주민들은 말을 타는 풍습을 포함, 의식주 전반에 걸쳐 다방면에서 변화를 불러왔다. 그 중 획기적인 것은 토기제작 기술이었다.

가야토기는 매우 단단하여 물을 부어도 스며들지 않으며 두드리면 쇳소리가 나는 특징이 있었다. 이런 가야토기 제작기술이 왜국에 전파되면서 5세기 초부터 스에키(질 좋은 토기라는 뜻)가 생산되었다.

스에키는 가마를 만들고 구워내는 방법 등의 고급기술이 필요한데, 가야인들이 직접 제작하거나 현지인들에게 기술을 전파하였다.

철기뿐만 아니라 가야의 기마(騎馬)문화는 호족들 사이에서 순식간에 퍼져나갔으며 고분에서 출토된 하니와(埴輪; 흙을 구워 만든 인형)’ 역시 가야의 토기제작기술에 접목된 가야문화이다.

 

무역으로 도자기 수입

일본은 가야에서 전파한 도기를 만드는 기술을 전수받았지만 더 이상의 발전은 없었다.

중국에서 한반도로 이어지는 첨단기술을 고려와 조선은 중국을 능가하는 신기술로 승화시켰지만 왜국은 이를 소화해 낼 능력이 없었다. 기술개발에 의한 자체 생산보다는 무역을 택하였고 왜구를 통한 약탈물자의 확보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더구나 전국시대(15C 중반~16C 후반) 100여 년 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도자기 생산은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1323년 여름 중국에서 왜국으로 향하던 무역선이 신안 앞바다에 좌초 되었다. 그 뒤 약 650(1975)이 지나 신안마을 어부의 그물에 중국도자기 6점이 걸려 올라오면서 잠자던 도자기들이 인양되어 보물이 되었다.

이는 중국과 한국 일본 3국 간에 활발한 해상무역 거래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대표적 사례이다.

 

조선막사발이 이도다완

이 무렵 왜국에서는 차를 수행의 경지로 끌어올린 다도문화가 정착되었는데 센노리큐(千利休; 오다 노부나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차 선생)’라는 사람이 창시자로 알려지고 있다.

차문화는 살기 등등한 무사들이 차를 마시고 마음을 다스리게 하는 하나의 미덕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 일본의 상류층의 차문화는 부와권력을 상징하였으며 수입된 명품 다기는 무사의 1년 봉록에 해당 할 만큼 치솟았다.

이중 센노리큐의 감정을 받은 다기는 성 한 채 값이었다고 하니 차에 대한 사치가 절정에 달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을 통일(1590)한 토요토미 히데요시 역시 차문화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조선의 차문화와 다기에 크게 매력을 느꼈는데 찻잔은 어이없게도 고급 청자도 백자도 아닌 막사발이었다.

조선의 막사발은 막걸리 잔이나 국그릇에 불과한 생활자기의 하나일 뿐이었지만 말차를 즐기기엔 최적인 다기였다. 그들은 이 그릇을 이도다완(井戶茶碗)’ 이라 불렀다.

막사발이 그들의 눈에는 보물로 보였으며 완벽한 규격미 추구와 달리 거칠고 비대칭인 막사발을 보고 자유분방한 자연미와 파격미를 가졌다고 평가하였다. 한 술 더 떠서 찾잔 내면이 마치 작은 옹달샘 같다며 감탄하였다. 놀랍게도 조선의 막사발에 불과한 이도다완은 일본 최고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도자기 공장

선풍적인 다이묘(大名)의 차문화는 찻잔을 필요로 했으나 이를 만들 수 없어 수입하였다. 권력자와 영주들은 다기를 무사들에게 하사품으로 내리기도 하였는데 수입 다기는 자연 고가(高價)에다 부와 권력의 상징이 되었다.

죽도왜성을 쌓았던 사가현(佐賀県)의 성주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임진왜란 시 휴전이 되었음에도 본국으로 귀국하지 않은 이유는 도자기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잔류하는 수 년 동안 영남 일대의 도자기를 긁어모았다. 특히, ‘막사발확보를 위해 골짜기에 흩어져 개인요를 운영하고 있던 조선 도공들에게 식량등 약간의 편의를 제공하면서 제작을 강요하고 감시하며 직접생산 하였다.

현지에서 생산된 도자기는 약탈물자 집결지였던 죽도왜성의 해창포구를 통하여 매일같이 본토의 영지인 사가현으로 실어 날랐다. 이런 막사발은 이도다완이 되어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상납되었으며 일본 상류층에 선물하거나 판매하면서 가문의 지위와 막대한 부를 축적해 나갔다.                             배종진/서향토사연구소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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