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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320 호 | 기사입력 [2022-05-24] | 작성자 : 강서구보

천성진성에서 부산해전 준비-강서향토사/ 배종진(강서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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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 침입의 길목

가덕과 눌차대교를 통하여 가덕도로 진입하면 해저터널 진입 직전 우측 바다 쪽에 제법 규모가 큰 포구가 내려다 보인다. 이 포구는 가덕수로로 진입하면서 진해만을 통제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한 천성항이다. 바다에 접해 있는 연대봉 산자락에는 천성진성(부산시지정 기념물 제34)이 자리잡고 있다. 천성포구를 통해 남쪽 해안을 방호하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 잡은 조선수군의 포소진성(浦所鎭城:바닷가에 위치한 성)이다. 현재 성터는 복원공사 중이고 포구는 국가어항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어 대규모 콩크리트 안벽(岸壁)에 방파제와 등대(망루 등대)가 설치되어 옛 모습을 찾기 어렵다.

왜구가 침입하는 길목이자 피해가 많았던 가덕도 일대는 조선 중종5(1510) 삼포왜란 이후부터 진영(鎭營)설치 계획이 있었다. 중종39(1544) 사량진에 왜구가 침입하면서 이곳 방어의 필요성이 증대됨에 따라 바다에 병선을 보호하는 시설과 함께 성을 쌓아 수군을 주둔케 하였다. 처음에는 가덕진관 소속의 천성포보(天城浦堡)로 축조되었다가 이후 천성진으로 승격되었으며 만호(萬戶:4품 무관직)가 지휘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첫 보고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선조 임금에게 최초로 임진왜란의 발발(1592413)사실을 알린 장계에 의하면 삼가 사변에 대비하는 일로 아뢰나이다. 오늘 임진년 415일 하오 8시에 도착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균의 공문에 오늘 14일 상오 10시에 도착한 가덕진 첨사 전응린과 천성보 만호 황정 등의 보고에 가덕도 응봉의 감고(監考:조선시대 봉화간을 감독하던 사람) 이등, 연대봉 감고 서건 등의 보고에 이달 13일 오후 4시경 왜선 몇 십 척인지 대개 보는 바와 같이 90여척이 갈도를 지나 부산포로 향하여 잇달아 나온다.’(이하 중략)라고 보고하였다.

응봉은 가덕진에서 가까운 산봉우리이고 연대봉은 천성진의 배후 산이자 가덕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459.4m)이다. 아마도 감고 서건은 천성진 소속의 요망색리(瞭望色吏:눈이 밝은 관측자)로 추정된다.

 

부산대첩 작전 준비

천성진은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이 안골포의 왜적 함대를 공격(1592710)할 때 조선수군의 후방을 지켜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옥포승첩에 이어서 한산대첩 등 3차에 걸친 해전에서 연승한 이순신 장군은 부산포에 몰려있던 왜적의 근거지를 공격하기 위해 전라좌수영을 출발(1592824)하였다. 828일 가덕도 천성선창에서, 29일에는 가덕도 장항에서 연합작전 계획을 수립하고 91일 첫 닭이 우는 것을 신호로 전함 74, 협선 92척의 연합함대가 하루 종일 부산포를 공격, 적선 100여 척을 분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날 사용한 전술이 바로 장사진(長蛇陣)이며 녹도만호 정운(鄭運)장군과 다수의 장졸이 전사하였다. 부산시는 부산해전 승첩일인 이날을 기념하여 부산시민의 날’(음력을 양력으로 환산한 105)로 정하였다.

 

비극의 가덕도 해전

조선 수군의 맹활약으로 왜의 수군은 남서해안 쪽으로는 한 발자국도 진전하지 못하였지만 이순신 장군이 파직당한 후 가덕 앞바다는 조선 수군의 비극적인 현장으로 변하였다. 이순신의 파직 후 3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정유재란 시 부산의 왜군을 소탕하기 위하여 출정하였으나 대패하고 조선 수군은 궤멸되고 말았다.

1597618일 한산도를 출발한 원균의 함대는 19일 안골포로 공격하러 갔으나 왜군의 기습을 받고 가덕도로 빠져나갔다. 하지만 안골포의 왜군을 지원하기 위해 가덕도 일원에서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던 왜장 시마즈와 다카하시 등의 왜군에 부딪쳐 싸우다가 크게 패하였고 부산 쪽으로는 진출도 못하였다. 물을 찾아 가덕도에 상륙한 조선수군 400여명도 왜군의 매복에 걸려 전멸 당하였다.

원균의 함대는 칠천도로 패주하였으나 그날 밤 조선 수군은 거제도 칠천량에서 왜군에 포위되어 완전 궤멸되고 말았다. 실로 어처구니 없는 패전이며 임란사상 유일한 조선 수군의 패전이기도 하다. 이날 배설(경상우수사)12척의 배로 겨우 도피 및 탈출에 성공하였다. 이순신 장군이 다시 3도수군통제사로 복권된 후 선조가 수군을 없애려 하자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하고 올린 장계는 장군의 결사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천성진성 복원사업

천성진성은 전국에 40여 개소 밖에 없는 포소진성으로 희소가치가 매우 높은 성이다. 구릉지에 자연스럽게 축조되어 흔적이 많이 보존되어 있다. 체성일부와 남문지의 옹성(甕城)터는 아직도 형태가 그대로 남아있다. 부분적이긴 해도 온전히 남아 있는 성곽은 옛성의 규모와 축성법을 짐작케 한다. 성은 둘래가 840m에 너비 4.5m이고 높이가 약3m이다.

고지도상에는 성문이 4곳이고 주 출입문은 서문이다. 성곽 내부에 객사(客舍)와 아사(衙舍), 좌청, 우청, 이청, 사령청, 집사청, 창고, 포사청(砲使廳), 화포수청(火砲手廳) 등이 표시되어 있고 성밖 서쪽해안의 선창에는 선소인 어변정(禦變亭) 등이 있다.

복원사업은 성터 내 사유지 매입이 완료되었고 부산박물관의 5차 발굴작업은 마무리 단계에 있으며 성문과 객사, 아사 등의 건축물은 2036년까지 3단계에 걸쳐 복원될 예정으로 있다.

 

부산해전 승첩기념 대제

부산해전이 한산대첩에 버금가는 대첩이고 천성진이 이순신 장군이 머물다 가신 역사의 현장이지만 장군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고 추모하는 행사가 없었다.

강서구는 강서문화원 주관으로 이곳 천성진성터에서 두 차례의 부산해전 승첩기념 대제’(2012, 2013104)를 지냈다. 이날은 충무공의 후손들인 덕수 이씨 종친회와 해군작전사령부에서 참석하는 등 뜻깊은 행사를 이어왔으나 아쉽게도 현재는 중단된 상태이다. 천성포구에는 국가어항 시설 공사 마무리 후 이곳이 이순신 장군의 부산해전 출정지였음을 알리는 기념비를 세워 역사적 사실을 기리게 할 예정이다.

배종진/ 강서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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