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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307 호 | 기사입력 [2021-04-23] | 작성자 : 강서구보

강서향토사-가덕도 척화비에 얽힌 사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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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의 섭정
(攝政)

고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11살의 어린 소년에 불과하였다. 표면상으로는 조대비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을 내세웠지만 대원군으로 봉해진 흥선대원군은 고종을 대신하여 자연스럽게 준비된 섭정(攝政)의 길로 들어 설 수 있었다.

대원군은 국정 전반에 걸쳐 조선역사에 유래 없는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였다. 당시 세도정치의 전횡을 일삼던 안동 김씨 일파를 제거하고 당파를 초월한 인재를 등용하였다. 국가 재정낭비와 당쟁의 원인인 서원을 철폐하고 사대와 당파의 소굴이던 만동묘(萬東廟;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던 곳)를 없애버렸다. 또한 육전조례(六典條例)’대전회통(大典會通)’을 펴내 법률제도를 확립하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고자하였다. 관리와 백성들의 사치와 낭비를 근절하고 양반과 상민 구분 없이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뿐만 아니라 왕실의 위엄을 위하여 경복궁을 재건하고 서양 강대국의 세력이 침입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하지만 막대한 국가재정이 필요한 경복궁 재건은 대원군을 옥죄는 부메랑이 되었고 외세의 접근을 차단한 쇄국정책은 자충수(自充手)가 되었다.

주변국의 정세

조선왕조는 병자호란(1636) 이후 수세기 동안 사대교린(事大交隣)이라는 미명 아래 쇄국정책을 이어왔다. 흥선대원군 역시 국내적으로는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국외적으로는 청나라를 제외하고는 척양척왜(斥洋斥倭)를 주장하는 쇄국정책을 고수하였다.

중국도 명나라 200여 년간 연안지역에 왜구를 포함한 해적들의 분탕질 방어와 해상 밀무역을 금지할 목적으로 해금(海禁;하이진)이라고 하는 쇄국정책을 고수하였다. 청나라 초기에도 해금을 강화했으나 국가가 안정되면서 쇄국을 점차해제(1684, 강희23)하였고 영국과 교역을 하면서 불균형 무역으로 아편전쟁(1840)을 치르면서 서양열강에게 완전 개방하게 된다.

일본 역시 쇄국(鎖国; 사코쿠)을 고수하였으나 흑선(黑船)으로 불리는 미국 페리함대의 무력시위 이후 미일 화친조약을 맺으면서 해금(解禁)정책으로 전환하였다.

당시 구미 열강들은 산업혁명 이후 물자 생산이 확대되자 새로운 시장개척이 필요하였다. 뛰어난 항해술과 무기체계를 바탕으로 세계 각국들과 교역을 하고 식민지를 확장하던 시기였으나 조선은 오로지 청나라에 의존한 사대외교만이 있었을 뿐이다.

천주교 박해의 단초(端初)

대원군이 처음부터 천주교 박해와 쇄국을 내세운 것은 아니었다. 당시 조선에는 이미 천주교가 일반 백성은 물론 양반가에까지 깊숙이 전파되고 있었다. 대원군의 부인 민씨는 아들이 왕이 되자 감사미사를 올렸으며 고종의 유모 박씨는 마르타리라는 세례명을 가지고 있는 천주교도였다.

대원군은 천주교를 이용해 조선을 압박하는 러시아를 견제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당시 조선에 머물던 프랑스 신부가 북경 조선교구 주교에게 보낸 편지(1864818)에 따르면 대원군이 운현궁에서 천주교 신도인 전()승지(承旨) 남종삼에게 러시아를 몰아내면 종교의 자유를 주겠다고 제안 하였다라고 보고하였다.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以)를 생각한 것이었다.

그런데 2년 뒤 이 프랑스 신부가 의금부에 체포되었다. 의금부는 남종삼이 반란음모를 꾸몄다고 보고했다. 노론대신들은 남종삼을 추국해 진상을 밝히자고 들고 일어났다. 대원군이 천주교와 교섭한다는 정보가 누설된 것이다. 청나라에서 천주교 탄압사건이 발생한 민감한 시기에 대원군은 과감한 개혁추진과 만동묘 철폐로 노론을 중심으로 한 반대원군파의 견제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역으로 사학(邪學)을 탄압해야만 정통성을 회복할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정치적 위기상황을 맞게 되었다. 돌파구를 찾아야했다. 그 결과가 5년 동안 벌인 병인박해(丙寅迫害)로 불리는 천주교 탄압이었다. 천주교 탄압이 불러온 결과는 프랑스군의 복수극인 병인양요(丙寅洋擾)로 이어졌다. 병인양요는 또 다른 양요를 불러오게 된다.

조불전쟁 병인양요(丙寅洋擾)

고종 3년 초(丙寅年;1866111) 좌우포도청은 장경일(張敬一)이라는 사내를 체포하였다. 그는 인상착의가 눈은 우묵하게 들어가고 콧마루는 덩실하게 높은 7척 거구라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는 밀입국해 선교활동을 하면서 북경 주교에게 보고를 해오던 프랑스 외방전교회 신부 베르뇌(Berneux)였다. 이어서 천주교도 색출과 처형이 시작되었다. 신미년(1871)까지 무려 8,000여명이 넘는 천주교도가 목숨을 잃었다. ‘수도 한양에 세울 큰 교회를 짓는다고 꿈에 부풀어있던 전승지 남종삼이 제일먼저 처형되었다. 프랑스 선교사 12명중 9명이 체포되어 목잘려 죽었다. 생존자 리델이 중국으로 도망(186677)쳐 북경의 프랑스 함대사령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제독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청나라 조정은 조선에 프랑스군이 군사를 일으킬 것 같으니 심사숙고하라는 긴급전문 비자(飛咨)’를 보내왔다. 대원군은 수만리 떨어진 프랑스에 누군가가 알려준 것 이라며 천주교도 색출 강화령을 내렸다.(186678일 고종실록)

로즈 제독이 지휘하는 1,230여명의 해병대가 승선한 프랑스 함대 7척이 강화도에 도착(911)하자 도순무영(都巡撫營; 순문사의 임시군영)도륙되기 전에 돌아가라고 경고했다. 그날 대원군은 화친은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다(若和親則是賣國也)’는 글을 의정부에 내렸다.

프랑스군은 강화도에 상륙하여 1개월간 분탕질을 했고 섬 전역은 불타올랐다. 왕실의 외규장각도서 등 고문서와 은괴 등이 약탈당했다. 프랑스군은 조선군 좌선봉장 양헌수(梁憲洙) 장군이 지휘하는 정족산성 전투에서 수차례 격돌 후 퇴각하였으나 전사 3명과 35명의 부상자로 피해는 경미하였다. 조선군도 5명 사망에 불과하였다. 양헌수 장군은 병인일기에 전투사항을 소상히 기록해 두었다. 양헌수 장군은 서양인과 싸워 이긴 유일한 조선인장수가 되었다. 하여간 조선은 조불전쟁에서 승리하였고 양이의 개항요구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못하였다. 배종진/강서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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