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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342 호 | 기사입력 [2024-03-22] | 작성자 : 강서구보

지역의 예술가를 찾아서-"낙동강은 삶의 상징적 압축판"

글이라는 것을 대단하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좋은 글과 덜 좋은 글이 있을 뿐입니다.”

강 자락에 삶터를 잡고 40여 년간 낙동강을 천착하며 문학을 붙잡고 있는 시조시인 서태수씨(76). 시조시인이긴 하지만 그는 수필, 평론, 소설 등 다양한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자신만의 문학을 벼리고 있다.

여러 문인들이 낙동강을 소재로 많은 글을 썼지만 그만큼 낙동강을 오래 노래한 이는 드물다. 때문에 그에게서 낙동강을 떼놓고 이야기 하기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여태까지 그가 발표한 낙동강 연작시조만도 500여 편이 넘는다. 마치 그의 가슴 속에는 유유한 낙동강을 품고 있는 듯하다.

서씨는 1975년 여름, 옛 구포다리 위에서 낙동강 홍수를 보며 쓴 게 첫 시로, 당시 유신의 종말을 그린 작품이었다고 밝혔다.

그가 본격적으로 낙동강 시조 연작을 돌입하게 된 때는 70년대 중반이었다. 이때부터 낙동강 시조 이외에는 다른 주제의 시는 창작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대학시절 문청이었던 그가 쓴 시작품은 세상을 향해 던지는 표창(標槍)이었다고 말했다. 날카로운 표창은 시가 되지 못했고, 동시에 세상을 향해 자신을 던질 수 없는 자화상을 발견했다. 이른바 유신시대 형편이 어려운 농촌 젊은이들이 겪는 시대적 고뇌였던 것이었다.

이후 그는 시조를 쓰며 낙동강을 천착하게 되고, 표창은 원반이 되어 세상으로 날아갈 수 있었다.

국문과를 나온 그는 중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한편으로 시조 창작에 몰입했다. 한때 문학계의 등단제도는 소멸할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예측이 빗나가자 1991년 느지막한 40대에 등단했다.

등단 후에는 강서와 낙동강이라는 향토성을 물씬 풍기는 작품들을 발표하며 지역 문학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낙동강과 강서에 대한 그의 애정은 유별나다.

그의 말을 빌리면 강서는 낙동강 1,300리 하중도(河中島)로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을숙도는 여의주고 장자도는 용의 혀에 해당하며, 가덕도는 용의 뿔이라고 했다. 그리고 다른 곳은 갖지 못한 강과 바다, 갯벌, 둔치, 모래톱 등 모두 가졌다고 말했다.

낙동강은 내게 삶의 상징적인 압축판입니다. 또한 인류 삶의 현장기록이기도 합니다. 또 강은 역사성을 담고 있으며, 흐르는 것은 모두 강입니다.”

그는 강에 대해 처음 보는 이는 시퍼런 강물만 보이지만 10년 정도 지나면 물길이 보이며, 20년 정도 있으면 강둑이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쉰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강둑을 찾았다고 웃었다. 60년 넘게 강변에 살면서 자신의 문학적 소재를 강의 서정성으로 확장하고 있다.

평생 강변을 맴돌면서 시작의 테마를 강변 서정이 깃든 서민적 삶에서 찾고 있습니다. 강의 이미지를 낙동강 연작시로 창작하며 시조의 전통 율격과 서정의 현대적 변용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문학작품에는 지정학적인 낙동강의 실체도 있고, 강에 젖어 살았던 사람들의 정서와 역사도 포함된다고 밝혔다. 궁극적으로는 강만 흐르는 게 아니고 세상만사 모두 흐른다는 사실을 담게 됐다고 말했다.

수필에도 일가를 이룬 그는 자녀교육 체험 수필로 스스로 생활수필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이는 형식적 미학은 구성면을 집중 고려하고 독자가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시조의 율격미가 적용된 수필집으로 2017조선낫에 벼린 수필을 펴내기도 했다. 또한 지역 문인들의 시, 시조, 수필은 모두 그의 평문을 싣고 있다. 이와 함께 그는 수필 같은 장시조, 소설 같은 서사시조, 시적 형상화를 가미한 수필 등을 창작하며 지역 문학을 견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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