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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326 호 | 기사입력 [2022-11-24] | 작성자 : 강서구보

가야 문명의 출발지 망산도(望山島)4-강서향토사

파사석탑(婆娑石塔)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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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가 신행을 오면서 혼수품을 비롯한 많은 문화유산을 가지고 왔지만 세월의 흐름에 사라지거나 동화되었다
. 그러나 쌍어문양과 파사석탑은 아직도 가락국의 상징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삼국유사 금관성 파사석탑 조에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일 때 세조 수로왕의 비 허왕후가 건무 24년 갑신년(48)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오면서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양친의 명령을 받들어 배를 띄워 동쪽바다로 향하다가 험한 파신(波神)의 성냄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 부왕에게 아뢰었더니 부왕이 이 탑을 싣고 가도록 명하였다. 이에 편리하게 건너게 되었다.(중략)

공주는 성난 파도로 인하여 첫 항해를 실패하고 돌아가 파사석탑을 싣고 나서부터 무사 항해를 하였다. 파사석탑이 파신의 노여움을 가라앉히기 위한 액막이 용이었음을 밝히는 대목이다.

일연스님은 이 탑을 보고 탑은 모가 난 5층이요 그 장식과 조각은 매우 기이 하며 돌은 약간 붉은색 무늬에 성질은 무르니 이 지방물건이 아니다.’라고 파사석탑 조에 남겼다.

하지만 후대의 사학자들은 이 탑이 과연 인도에서 온 것인가? 라는 의문과 함께 파사석의 진위와 용도에 다양한 학설을 제기해왔으나 제대로 고증되지 못하였다.

이탑에 많은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던 김해의 향토사학자 허명철 박사는 탑 앞에서 200여 일을 마주하며 골몰하다가 영감이 떠올라 탑을 해체하는 절차를 거쳤다. 놀랍게도 해체한 탑 속에는 중앙의 사리공과 작은 구멍을 비롯하여 알 수 없는 문양들이 발견되었다.

또한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파사석은 닭 벼슬의 피를 묻혀 진위를 가린다는 것을 시험하기 위해 파사석 가루에 닭 벼슬피를 떨어뜨려 시험한 결과 피가 굳지 않는 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최근(2019)에 와서 국립중앙박물관과 김해시의 의뢰로 고려대학교 산학협력단이 비파괴 분석을 한 결과 엽랍석을 함유한 사암이며 한반도에는 없는 돌임을 밝혀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파사석탑의 전래과정을 포함한 의문점들은 일시에 정리되었다.

인도의 아요디아에서는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기 위한 액막이 용도로 파사석을 갈아 만든 가루를 얼굴에 바르는 관습이 지금까지 남아있다고 한다.

 

보개산 자락의 3개 사찰

왕과 왕후가 역사적인 혼례를 맺었던 보개산(寶蓋山)자락과 주포는 상징적이고 성스러운 지역으로 기념되었다. 왕은 주포를 내려다 보고 멀리 기출변과 공주가 천기를 달고 항해해 오던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보개산 서쪽 벼랑에 왕자를 위해 신국사를 지었다. 또한 왕후를 위하여 동쪽 골짜기에 진국사, 왕 자신을 위하여 산 가운데에 흥국사를 세워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빌고 이를 삼원당(三願堂)이라고 불렀다. 또한 산 이름도 보개(왕의 日傘을 뜻함)산 또는 허왕후를 상징하는 보배산으로 불렀다. 보개는 베개의 방언으로 산 능선이 베개 모양으로 길쭉하여 초야를 상징하는 듯 다소 로맨틱하기도 하다. 이후 또 다른 이름으로 밝은 달을 상징하는 명월산(明月山)으로 불리기도 했다. 수로왕과 허왕후의 신행과 초야를 성스럽게 미화 시키고자 자연물에도 최고의 예우를 갖추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보개산 아래에 수로왕을 상징하는 사찰은 현재의 흥국사가 명맥을 잊고 있다. 흥국사는 임진왜란 당시 불타면서 폐사 되었다가 조선 숙종 때(1708) 중창되면서 김해명월사 사적비가 세워졌다. 비문에는 수로왕이 처음 절을 지을 때는 흥국사였다가 이후 명월사로 바뀌었다는 것과 창건과 관련된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중창 당시 갑신년(서기144)이라 새겨진 기왓장이 나왔다는 기록을 통해 장유화상이 서역에서 불법을 전해왔음을 증명하는 것 이라고 보기도 한다.

명월사는 조선 말기에 또 한 번 폐사되었다가 우담스님이 흥국사로 다시 중창(1942)하였다. 흥국사 극락전에는 사왕석(蛇王石)’이라 불리는 부조 석판이 모셔져 있다. 이 석판(가로74cm, 세로 52cm, 두께15cm)에는 뱀 한마리가 좌불을 휘감고 보호하고 있는 모습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인도의 신화에 의하면 사왕은 뱀의 왕 무칠란타이며 붓다가 깨달음을 얻고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 폭풍과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였다고 전해온다. 사왕석은 석탑의 기단부 면석(面石)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국내유일의 사왕 조각품으로 폐사지에서 발굴되었다.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대웅전 우측 뒤편에 위치한 미륵전은 미륵부처가 모셔져 있지 않고 길쭉한 돌 두개가 세워져 있다. 마치 남녀를 상징하는 느낌을 주는 이돌 들은 수석(壽石)이 아니고 남성성을 상징하는 링가(linga; 힌두교 시바 신의 표상)’의 일종이다. 인도의 풍습으로 여성성을 상징하는 요니(yony; 시바의 아내 삭티)와 링가는 김해 일원의 부은암, 모은암, 장유사, 만어사 등 가야국과 관련된 연기사찰(緣起寺刹)에서 특이한 형태와 크기의 요니와 링가들을 볼 수 있다.

사왕석, 링가와 요니, 신어, 쌍어 등은 인도에서 직접 건너왔거나 다양한 경유지를 거쳐 남방문화가 전래되었음을 증명하는 징표이다.

 

가락국의 흔적과 강서

수로왕이 창건한 가야국의 첫 국명이었던 가락은 인도 드리비다의 고대어로 물고기를 뜻한다. ‘가야드리비다의 현대어로 역시 물고기이다. 가락국은 1,500여 년 전에 사라졌지만 오늘날까지 가야국의 지명으로 남아 있는 곳이 있다. 강서구 가락동은 옛 가락국의 국명을 마을 이름으로 물려받은 유일한 동네이다. 가락동을 포함해 강서구 전역이 신어(神魚)를 상징하는 신어산을 안산으로 하고 있고 낙동강을 모태로 하여 생성된 삼각주 도시라는 것 또한 물과 물고기의 묘한 인과관계이다.

가덕수로를 통해 망산도에서 시작된 남방문화와 가야문명의 융합은 보개산을 베개 삼아 수로왕과 허왕후가 초야를 보내며 그 상징성을 더하였고 낙동강을 거슬러 오르면서 극대화되었다.

가야문명은 지금의 김해를 중심으로 한 6가야에서 크게 번창하였지만 출발점인 강서구에는 그때의 흔적과 설화가 고스란히 남아있으며 가락(駕洛)’이라는 지명까지 남겼다.() 배 종진/ 강서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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