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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324 호 | 기사입력 [2022-09-23] | 작성자 : 강서구보

강서향토사-가야문명의 출발지 망산도(望山島)2 -배종진(강서향토사 연구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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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속의 섬

현재의 망산도는 삼국유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 김해도호부조 등에 전해지는 기록에 근거하여 망산도 비가 세워지고(1954) 이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1세기 경 한반도 남해안의 지형은 지금에 비하여 바닷물의 수위가 무려 5m정도나 높았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해평야 또한 당시 김해만으로 바다 속이었다.

그렇다면 신화의 출발지이자 주인공격인 망산도(해발 5m정도)는 바닷물 속에 잠겨있거나 윗면이 약간 노출되는 암초에 불과했을 것이다. 망산도는 글자그대로 멀리 내다보는 ()’을 볼 수 있는 높은 곳이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바위섬이 완전하게 솟아오른 지금도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수로왕은 유천간에게 경주(輕舟:가볍고 빠른 작은 배)와 준마(駿馬)를 이끌고 망산도에서 도래(渡來)하는 허황옥을 기다리게 하였다. 유천간은 멀리서 갑자기 나타난 붉은 기를 매달고 오는 배를 보고 횃불을 올렸다. 곧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 뛰어왔다.’ <가락국기 내용 중>

이 대목에서 망산도에는 다수의 사람이 상륙해 있고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어야 하며 말들이 주변의 뭍에 대기하고 있었음을 가정해 볼 수 있다. 가덕수로를 통하여 망산도 방향으로 진입할 시 현재의 망산도에 서는 먼 바다를 조망하기가 어렵고 바위섬에서 횃불을 올리며 다수의 사람들이 환영의 퍼포먼스를 하기에는 적절하지가 않다.

 

삼국유사의 신뢰성

삼국유사 가락국기편을 자세히 살펴보면 허황옥을 맞이하는 과정과 당시의 상황을 시간대별로 잘 짜여 진 각본처럼 전개시키고 있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문헌은 삼국유사이며 가락국에 관한 모든 사료(史料)가 이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 재위 시(1277) 왕명을 받아 일연스님이 집필하였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은 몽골족이 국토를 유린하고 그들이 세운 원나라가 고려를 속국으로 삼고 횡포를 극심하게 부렸던 시기이다. 또한 무신 정권기로 대몽항쟁을 통해 자주의식과 민족 자긍심이 최고조에 달하던 시기로 볼 수 있다.

일연스님은 경주 장산군(지금의 경산)에서 태어나 국사(普覺國師;최고의 승직)에 이른 분이다. 태어나면서부터 격동의 시기를 격은 일연스님은 종교와 종파를 떠나 민중과 함께 했으며 그들의 삶에 귀 기울이며 살아오신 분이다. 특히, 역사의 현장은 직접 찾아가 목격하였으며 듣고 보고 답사한 바를 채록하여 두었다.

72세의 고령에 청도 운문사에서 3년여에 걸쳐 집필하였지만 삼국유사를 비롯한 많은 사료들이 단시간에 저술된 것이 아니다. 그동안 발품을 팔아 기록해둔 것을 정리하는 기간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민족 주체성과 자긍심으로 집필한 다수의 책들은 면면이 이어온 한민족의 역사는 물론 다양한 관습, 생활환경, 설화 등을 기록해 야사(野史)로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 삼국유사는 물론이고 서동과 선화공주이야기’, ‘원효와 의상의 설화’, ‘연오랑세오녀 이야기’, ‘만파식적 설화등은 그가 아니었으면 전해 내려오지 못했을 것이다.

정사(正史)에서 다루지 못하는 것을 발로 뛰며 수집한 야사에서는 더욱 소상하게 기록으로 남길 수가 있다. 더구나 역사의 현장은 직접 확인하였기에 정확도가 매우 높다. 요즈음 한창 유행하고 있는 구술(口述) 아카이브(archive; 가치 있는 자료를 기록해두는 일) , 역사의 현장에 사람의 이야기를 더한 구술사(口述史)’를 일연스님은 8백여 년 전에 이미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정사에서는 볼 수 없는 재미있는 사실들을 정확하게 기록하여 현장감을 더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일연스님은 종교는 물론 풍수지리, 정치 사회, 경제 등의 모든 분야에서 해박한 식견을 갖추었으며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국사의 역할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만산도(滿山島)가 망산도?

가야사는 많은 분들이 연구하고 논문을 발표하거나 책자를 내고 있다. 강단에 서는 분들도 계시고 재야 사학자, 향토 사학자로 명망이 높은 분들도 있다. 하지만 허황후 도래시의 가락국기를 두고 해석하는 바가 상이하다. 특히, 지명비정과 가야불교 전래 과정에서는 판이하게 다르다. 뿐만 아니라 가야문명 자체를 임나일본부설에 근거하거나 식민사관에 의해 왜곡하는 학자도 볼 수 있다.

지도를 펼쳐놓고 2천 년 전으로 돌아가 망산도, 기출변, 유주지, 별포진, 능현, 주포, 종궐, 만전, 보배산 등 가락국기에서 기록한 데로 허황옥이 도래할당시를 가정하여 관련된 지명을 살펴보기로 하자.

지금의 망산도는 옛 지명이 말무섬인데 망산도라 불리며 신화의 주인공이 되고 있다. 당시에는 바닷물 속에 잠겨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먼 곳을 조망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실제 망산도는 어디일까?

현 망산도에서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면 바다를 매립하여 조성된 부산신항 배후부지에 도로가 생기면서 두 쪽으로 갈라진 견마도(牽馬島:강서구 성북동 1508, 해발 30m정도)’라는 섬(현재는 산)이 있다. 이 섬의 본래 이름은 만산도(滿山島:신증 동국여지승람, 웅천현 지도)’였다. 만산도는 망상도가 경상도식 발성에 따라 음운변화로 인하여 만산으로 되었고 한자를 차자하여 고착된 것으로 보고 있다. 옛 이름도 그렇지만 먼 바다를 관망하기에 적합하고 갑자기 서남쪽 모퉁이에서 나타나는 붉은 돛과 깃발을 단 배를 볼 수 있는 곳으로 기출변(旗出邊)’을 연출할 수 있는 곳이다. 최근 일부 사학자들은 견마도를 망상도로 비정하고 있다.

배 종진/ 강서향토사 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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