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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319 호 | 기사입력 [2022-04-22] | 작성자 : 강서구보

강서향토사-대변청과 해창(海倉), 해창나루

변란 대비한 요충지

조선은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未曾有)의 전란을 치른 후 약 50여 년이 지나면서 전쟁의 피폐함과 후유증에서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되자 전국의 국방태세를 재정비 하였다.

왜구가 바닷길을 통해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길목이자 전략적, 전술적 요충지인 죽도에는 인조 24년 대변청(待變廳)을 설치(1646년 김해부사 이상경이 창설)하여 변란에 대비하였다.

대변청이 위치한 곳은 현재의 가락동 죽림 오봉산 자락이다. 이곳은 낙동강 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이 강물에 닿아 있는 암반지대로 낙동강 하구와 먼 바다 쪽도 한눈에 보이는 위치가 높은 곳이다. 또한 강물이 암반지대에 막혀 휘돌아 치고 수심이 깊어 큰 배를 정박하기에 용이하다.

효종 원년(1649)에는 김해부사 박경지가 황자5호 전함 1쌍과 사후선(伺候船) 2척 등 병선을 증강 배치하였으며 해창(海倉; 수군들의 군기를 보관하던 창고)과 화약고, 군기고, 병사 등을 짓고 병졸에서 역졸(驛卒)까지 많은 병력을 주둔시켰다. 화약고가 불타 다시 중수(1718)한 적도 있었으나 고종 33(1896) 폐지될 때 까지 250여 년간 대변청과 해창 일대는 국방의 요충지로써 군영과 군항의 역할을 다하였다.

 

임란 시 왜군 최고 군항

해창나루터는 임진왜란 시 왜군의 제2군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 휘하의 장수로 출정한 나베시마 나오시게(鎬島直茂) 부자가 죽도에 왜성을 축성한 이후 정유재란까지 67개월 동안 왜군의 군수물자 보급과 해상수송 거점 역할을 했던 곳이다. 대변청터 아래의 낙동강에는 왜군의 함선을 정박하였고 해창나루 터에서는 매일같이 조선인 포로와 노획한 물자가 본토로 수송되어 나갔다. 잔인하게 베어져 수집된 조선인의 귀와 코를 소금에 절여 토요토미 히데요시 앞으로 탁송되어 나가던 비극의 현장이 이곳이었다.

휴전회담 시 명나라 유격장 진운홍의 접반사로 죽도왜성을 둘러보았던 이시발의 서계에 의하면 평양성에 견주어진다 하였다. 천수각은 웅장하고 현란할 정도로 화려하고 조선 백성이 둔전과 고기잡이를 하며 왜군에 붙어살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또한 노획한 물자를 잔뜩 실은 화살같이 빠른 배가 죽도 포구에서 매일 일본으로 나갔다고 보고하고 있음을 볼 때 죽도왜성의 위상과 역할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곳이다.

전쟁이 끝난 후 왜군이 조선 성()을 점령하여 이용하였듯이 조선군 역시 왜군이 주둔하였던 곳을 이용하여 대변청을 설치하고 해창을 만들어 운용하였다.

당대 최고의 번화가

임진왜란의 공포와 후유증에 고기잡이배는 물론 날아가는 새들도 찾아들지 않는다는 죽도에 대변청이 설치되고도 사람이 찾아들지 않았다. 그러자 김해부사 이하지는 낙동강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경관이 빼어난 곳에 금파정(숙종18, 1692)을 지어 유림들을 출입시켰다. 이후 김해부사 유덕옥이 부임(1700)해 와서 많은 편의를 제공하면서 점차 사람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 죽도는 인구유입과 김해 남부의 관문 역할을 하면서 해창 부근은 점차적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수운(水運) 기능을 갖춘 해창은 군기 보관창고에서 김해평야에서 생산된 세곡(稅穀)을 집결시켜 수납하는 곳으로 점차 역할이 변모되어 가면서 낙동강 수로의 물류기지 역할을 하는 해상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특히 부가 가치가 높은 녹산, 명지의 소금배가 이곳을 거쳐 수운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장이 서고 객주와 요정이 생겼다.

장이 서면서 낙동강 뱃길을 이용하여 상류지역 내륙으로 오르내리며 상업 활동을 하던 가락의 한량들은 합천군 덕곡면 율지리 장터를 드나들면서 예인들의 가면극을 전수받아 이곳에서 연희를 하였다. 이런 연유로 인하여 해창나루터는 가락오광대의 발상지가 되었다.

해창나루 부근은 경관이 매우 빼어난 곳으로 조선후기 김해지역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이학규는 비경에 취하여 이를 찬양하는 4행시 한수를 남기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해창

일제강점기에도 해창 부근은 크게 발전하였다. 강가에는 일제에 의해 초대형 창고 2동이 건축되었다. 일본인 대지주들은 소작농들에게 착취한 곡물을 집결하고 유통하기 위한 보관용 창고가 필요했다. 강가에 지어진 창고는 뱃길을 이용하여 운송되어온 곡물 수납의 편의를 위해 배를 창고에 바로 접안하도록 설계되었다. 널빤지 사다리를 배와 창고에 연결되도록 거치하고 쌀가마니를 비롯한 곡물과 비료 등을 인부들이 짊어지거나 둘러메고 창고에 입하시키고 방출하였다. 물자가 들어오는 날이면 수십 명의 인부가 동원되어 북새통을 이루었다.

물류가 유통되고 정미업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대변청 자리에 들어섰던 면사무소를 중심으로 해창나루 앞에는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감시 또는 통제할 수 있는 가락지서가 들어섰다. 장터에는 한옥으로 지어진 최고의 요정 오봉관이 생겨나 지역유지와 거상들의 사교장 역할을 하였다.

5일장인 가락장은 해창나루를 통하여 상인들이 몰려들었고 뱃길을 이용하여 하류의 녹산 성산장, 상류의 선암장으로 이동하였다. 멀리는 대동 수문 운하를 통하여 구포장까지 연결되었다. 발동선을 이용한 상인들은 뱃전에 물이 찰랑거릴 정도로 상품을 선적하여 강을 오르내렸다. 해창으로 인해 도정(搗精)업도 크게 발전하였다. 봉림동 강가에 자리한 영단(營團)은 세곡으로 걷어 들인 벼로 정미한 쌀을 해창나루를 통하여 출하시켰다.

 

해창나루와 죽림나루

산업이 발달하면서 육로 교통사정이 좋아지자 해창 일대도 급격하게 변하면서 기능을 잃었다. 혹자는 해창나루의 기능과 위치를 잘못 이해하여 해창 나루터 위치를 죽림마을 강동교 아래로 알고 있다. 죽림마을의 나루는 덕도와 죽림을 잊는 강동교(1973)가 생기기 전까지 주민들의 편의에 의해서 운용되어 왔던 곳이다. 해창나루와 별개로 운용되던 나루로서 해창이 있던 곳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죽림나루라고 불러야 옳겠지만 오랫동안 해창나루가 명성을 얻어온 까닭에 사람들은 보통 이곳을 해창나루라고 부르고 있다.

배 종진/ 강서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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