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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313 호 | 기사입력 [2021-10-22] | 작성자 : 강서구보

강서향토사-강동동 원예시험장은 어디로 갔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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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합성 이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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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종의합성 이론은 종()간의 인공교잡으로 새로운 종의 탄생을 가능하게 한다는 이론이다.

예를 들면 배추의 속(; 생물의 분류단위인 목- - - 중에서 종의 위)식물인 배추와 양배추의 교잡을 통하여 유채(油菜)를 만들어 내고 그 과정을 이론적으로 규명한 것을 들 수 있다.

당시까지만 해도 같은 종끼리만 교배가 가능하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었다. 그러나 종은 달라도 같은 속의 식물을 교배하여 전혀 새로운 식물을 만들어 냈다. 종의합성을 통해 종간의 잡종을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이 이론은 다윈의 종의기원을 보완하는 내용으로 종은 자연도태의 결과로 성립된다는 다윈의 진화론을 보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렇게 서로 다른 식물을 교잡해 전혀 새로운 식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우장춘의 트라이앵글(U’s triangle)‘이라 부른다.

 

독일보다 앞선 조선의 온실

우 박사는 종자개량과 확보는 물론 농업기반시설에도 선진기술을 도입하여 계절을 뛰어넘는 획기적인 영농기법을 전파하였다.

그중에서도 온실을 이용한 시설원예는 가히 농업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시설원예는 비닐하우스에서 채소나 과일을 재배하는 농업기술을 말하는데 사실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당시 조상들은 한지로 온실을 만들고 채소를 재배하였다. 세계 최초라고 하는 독일의 하이델 베르크온실(1619) 보다 170년이나 앞섰던 과학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조리책이자 농업책인 산가요록(山家要錄;민가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기록)’에 의하면 온실을 만드는 법과 겨울철 채소를 재배하는 요령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이 책은 조선 세종, 문종, 세조의 어의(御醫)를 지낸 전순의(全循義)가 작물, 원예, 축산, 양잠, 식품을 총망라한 식품과 음식의 조리법을 수록한 책이다.

여기에 특이하게 동절양채(冬節養菜; 겨울철 채소 가꾸기)’가 기록돼 있는데 한겨울 채소를 재배하기 위한 온실 제작법이 소상히 기록돼 있다.

온실은 황토와 볏짚으로 만든 벽을 만들고 45°경사의 창틀에 기름을 먹인 창호지를 발라 햇살이 잘 스며들도록 만들어 덮었다. 또한 바닥에는 온돌을 깔아 지열을 이용하였고 외부의 가마솥에서 수증기를 유입시켜 내부의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였다. 기름 창호지의 인장강도는 지금의 비닐을 능가하며 빛의 투과력도 우수하여 채소재배가 가능했다.

, 온실의 3대 조건인 난방, 가습, 채광을 원활히 충족하는 원천 과학기술을 이미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독일의 경우는 난로를 피워 난방을 하는 방식이었다. 열기가 습기를 말려버리자 스팀시설로 보충하였는데 식물이 데쳐지는 현상으로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성종실록(1471)에 의하면 그해 정월 추운 겨울날 궁궐에 사용되는 꽃을 키우는 장원서에서 꽃이 핀 연산홍 화분을 임금께 올렸다. 그랬더니 성종이 꽃과 열매는 천지의 기운을 받는 것으로 그 시기가 있는데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에 역행하니 앞으로는 올리지 말라 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이런 연유에 따라 조선의 온실은 더 발전하지 못했다.

 

원예시험장 조성배경

다양한 품종의 작물을 시험재배 해 개량하고 종자를 얻기 위해서는 육묘장과 채소를 재배할 농지를 비롯, 온실 같은 시설물을 만들 대규모의 공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아무런 문제없이 이 조건을 충족할 부지가 바로 낙동강 삼각주 북단의 대사리였다.

이곳 대사리에 무려 5만 평 규모의 원예시험장이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이 부지가 일제강점기 시 일본인(이하 일인) 지주 하자마(迫間)가 소유한 농장이었기에 가능했다.

당시 강서의 토지 대부분이 하자마를 비롯하여 무라이, 다이찌, 하나조, 사토오의 농장이었다. 시험장 부지는 하자마에게 위임받은 일인 지주 식쟁이(조선인이 비하해서 부르던 일인)’가 관리하던 농장이었으며 조선인 소작농들이 채소와 과수를 재배하며 살아왔다.

광복이 되면서 일인들이 떠나자 이들이 소유했던 토지와 가옥은 모두 적산(敵産地, 敵産家屋)’으로 수용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5만여 평의 네모 반듯한 토지는 보상비가 한 푼도 들지 않았으며 대규모 시험장이 들어서는데 안성맞춤이었다. 부지 내에 건축돼 있는 가옥들은 직원들의 주택으로 사용할 수 있었고 농장을 관리하던 작업자들의 숙소 또한 그대로 사용할 수 있었기에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일인 지주는 농장 한가운데에 무려 본채 건평만 120여 평의 대저택을 지어 살았다. 이 가옥은 시험장이 들어서고 난 이후 시험장장의 관사로 사용되었다. 대저동 배밭 속 일인 지주의 본채 가옥이 통상 건평 60여 평 정도인데 반해 그 규모가 단연 압도적이다. 나머지 건물은 부장장과 연구원의 관사로 사용되었다.

일인 지주는 광복이 되면서 다시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고 소작인들에게 나름대로 농장을 분배를 하고 떠났다고 한다.

원예시험장이 자리를 잡고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을 무렵인 19603.15부정선거를 계기로 4.19혁명이 발생하자 전국적인 시위가 일어났고 관공서가 시위꾼들에 의해서 피습당하는 등 대혼란이 발생했다.

원예시험장에도 이들이 들이닥쳐 시험장장의 관사를 습격했다. 이들은 토지수용 당시 일인 지주로부터 토지를 분배받았기에 토지는 자기들 것이라고 하며 내 땅 내놔라고 난동을 부렸다.

관사의 집기 파손은 물론 당시 대사초등학교에 다니던 장장의 자제들에게 까지 행패를 부렸다. 학교에서 받은 교과서와 상장 등을 찢고 방바닥에 변(便; 대소변)을 보는가 하면 시험재배 중이던 온실 속의 작물은 물론 농장의 모든 작물들을 심하게 훼손하여 그해의 농사를 완전히 망쳐버리고 말았다.

배종진/ 강서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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