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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309 호 | 기사입력 [2021-06-23] | 작성자 : 강서구보

가덕도 척화비에 얽힌 사연4-강서향토사

전국에 척화비 건립

미국의 페리함대는 구로후네(黑船)로 압박하여 일본을 개항시켰지만 로즈스함대는 함포사격과 상륙작전을 통한 강력한 무력시위로 조선의 개항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로즈스는 전투에서는 비록 승리하였으나 외교에서는 실패하고 말았다.

전쟁이 한창일 때 조정에서는 5년 전 대원군이 선언한 척화의 뜻을 새겨 종로를 포함한 전국 200여 곳의 교통요지에 비석(斥和碑)을 세우도록 지시(1871, 음력 425)하고 양이의 침범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신미양요는 미국과 조선의 처음이자 마지막 전투였으며 미국이 아시아에서 최초로 성조기를 달고 치른 전투였다. 하지만 이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무의미한 전쟁이 되고 말았다. 신미년 전투 이후 미 해병대는 81년 뒤(1952915) 인천상륙작전으로 조선(한국)땅을 다시 밟게 되고 이때는 한국군과 함께 공산군과 전쟁을 치르고 혈맹이 되었다.

그런데 이 전투(신미양요)에서 미국 군함에 승선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상황을 지켜본 일본인이 있었다. ‘안토다로일본 첩보원이자 통역이었던 자다. 이자는 일본으로 귀국하자 그가 관찰한 강화도 뱃길을 비롯하여 열악한 조선군의 무기체계와 전쟁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여 보고하였다. 4년 뒤 일본은 이정보를 바탕으로 신미양요와 똑같은 방법으로 강화도를 침략하게 된다.

대원군의 실각

고종이 왕위에 오른 후 대원군은 섭정을 하면서 과감한 개혁을 시도하고 두 차례의 양요를 격어면서 정국을 주도해왔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민비를 배후로 한 여흥 민씨 세력을 비롯한 다수의 반대원군 세력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반대원군 세력을 규합한 민비는 대원군의 실정을 들어 상소한 유학자 면암 최익현의 소()를 계기로 고종 10(187312월 고종 나이 22)에 친정(親政)을 이끌어 내었다.

민비와 고종의 견제로 10여 년 동안 행사하던 무소불위의 권력을 내려놓고 실각한 대원군은 운현궁에 은둔하게 되고 이후 양주군 곧은골에 칩거하게 된다. 공식적인 직위가 없던 대원군은 비공식권력의 한계를 실감하며 통한의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운요호(雲揚號) 사건

명치유신(明治維新,1868)으로 메이지 천황을 옹립한 일본은 근대화와 개혁에 박차를 가하였고 지도층에서는 서양에 침탈 당한 손실을 자신들도 조선과 만주를 침공함으로서 만회하자는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고 있었다.

조선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일본은 대원군이 실각하자 신미양요 시 미국을 통하여 학습한 대로 1875년 운요호와 제2정묘호를 부산항에 입항시켜 무력시위(砲艦示威)를 벌인 다음 그해 9월 운요호를 강화도에 침입시켜 개항을 요구하였다. 강화도 수비대인 진무영(鎭撫營)은 고종에 의해서 대폭 축소된 상태였다. 조선수비대의 포격이 시작되자 운요호는 초지진과 영종진을 포격한 후 상륙 하였다. 초지진 첨사 이 민덕은 도주하고 조선군 수병 500여명은 포로16, 전사35, 대포 365, 화승총 130여정을 약탈당한 채 패주하였으나 일본군은 2명이 부상당했을 뿐이었다. 일본군은 영종진에서 방화와 살육을 자행하고 약탈을 한 다음 철수하였다. 두 차례의 양요에서 사생결단(死生決斷)으로 싸우던 조선군과 결의에 차있던 당당한 조선의 모습은 운요호 사건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조일 수호조약 체결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의 사죄를 요구하고 조선 영해 항행의 자유와 개항을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은 18762조일수호조약(일명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조약은 불평등 조약이었지만 조선 최초의 근대적 조약으로 알려져 있다.

대원군 실각의 계기를 제공한 최익현은 조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이후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의병활동을 하다 일본 대마도로 끌려가 아사순국(餓死殉國)하였다.

최근 연구한 자료는 아사순국 하겠다는 상소문을 작성한 것이 와전되었으며 풍토병으로 인한 사망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개화정책 시행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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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종진/강서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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