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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306 호 | 기사입력 [2021-03-24] | 작성자 : 강서구보

강서향토사-가덕도 척화비에 얽힌 사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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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비의 안식
(安息)

가덕도 성북동 천가초등학교 교정에 들어서면 왼쪽에 250여년이나 되는 압각수(鴨脚樹; 은행나무)그늘 아래 4기의 비석이 나란히 서서 작은 비림(碑林)을 만들고 있다.

이중 맨 오른쪽의 가첨석(加檐石; 지붕돌)이 없는 통비(通碑)가 척화비이며 형태가 비슷한 3기는 가덕절제사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이다.

가덕도 척화비(부산광역시 지정기념물 제35)는 흥선 대원군에 의해 신미년(辛未年; 1871)에 세운 것으로 원래 가덕포구인 선창마을에 있던 것을 지금의 천가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겨 놓았다. 천가초등학교는 옛 가덕진(加德鎭) 성터에 자리 잡고 있는데 학교를 둘러싼 돌담은 바로 가덕진성의 일부이다.

가덕진은 조선 중종39(1554)에 동남해안의 진관(鎭關)을 개편하면서 그동안 왜구로부터 피해가 많았던 이곳 가덕도 성북동에 본진(本鎭)인 가덕진을 설치하고 그 관할에 기존의 옥포진, 안골포진, 지세포진을 두고 천성동에는 속진인 천성진성(天城鎭城)을 설치하였다. 본진인 가덕진은 첨사(僉節制使; 3품의 무관), 천성진은 수군만호(水軍萬戶; 4품의 무관)가 지휘하였다.

가덕진성은 총길이 800m에 높이 2.3m 정도인 성벽의 일부가 남아있다. 성의 안팎으로 천가초등학교, 덕문중학교를 비롯하여 주민행정복지센타(현재 이전) 등 공공기관과 민가들이 성터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성벽의 돌을 울타리와 석축 등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덕진성의 위상은 대단했지만 이런 관계로 인하여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척화비의 24자의 문장

무려150여 년 이란 적지 않은 세월을 지켜온 가덕도 척화비에는 이런 글자가 선명한 붉은 글씨로 음각되어있다.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는 서양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아니하는 것은 화친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니 나의 자손만대에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라는 뜻이다.

마치 4·3조의 시조 같은 24자의 문장이지만 그 의미는 매우 강경하고 도전적이며 명령과 계도의 복합문장으로 지어졌다.

비문의 뜻을 이해하고 나면 흥선대원군이 왜 이곳에 까지 비를 세웠을까? 하는 의구심이 비석을 세우던 시대적 배경과 글씨의 주인공 대원군이 어떤 인물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흥선대원군은 누구인가?

대원군(大院君)은 조선시대 왕위를 계승할 적자손이나 형제가 없어 종친 중에서 왕위를 이어받을 때 신왕의 생부를 호칭하던 존호(尊號)이다.

조선조에 대원군은 세 분이 있었다. 조선 중기 명종 임금이 적장자가 없자 덕흥군의 아들이 14대 왕(선조;宣祖)이 되면서 부친인 덕흥군을 덕흥대원군으로 추존한 것이 최초이다. 16대 인조임금도 적장자가 아닌 관계로 부친을 정원대원군으로 추존했으나 이후 원종으로 봉작(封爵)하여 대원군이 아니다. 25대 철종 임금의 부친도 전계대원군으로 추존되었다. 26대 고종 임금 역시 적장자가 아니어서 부친 흥선군이 대원군으로 추존되었으며 흥선만 생전에 대원군으로 추존되었고 덕흥대원군, 전계대원군은 사후에 추존되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대원군이라 함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을 지칭하고 있다.

이하응은 인조 임금의 3남인 인평대군의 후손으로 직계 왕통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아버지 남연군(南延君; 李球)이 정조 임금의 이복동생인 은신군의 양자가 되면서 비로소 왕실과 가까운 종친이 되었다.

남연군은 영조 임금의 고손자이며 이하응(1820~1898)은 남연군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23세 때인 헌종9(1843)에 흥선군에 봉해졌다. 왕족이지만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하에 매우 불우한 삶을 살았으며 안동김씨의 세력권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불량배행세와 구걸까지 하며 자신을 숨기고 살아야했다. 야심가이던 흥선군은 철종 임금의 후손이 없자 대왕대비인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趙氏)를 통해 둘째아들 명복(命福)을 후계자로 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철종 사후에 명복이 왕(高宗)이 되자 흥선군은 살아있는 대원군에 봉해진다.

이러한 과정에서 흥선군은 천하의 명당이라는 곳에 부친 남연군의 묘소를 이장하고 상갓집 개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절치부심한 결과 아들을 왕으로 만들어 내었다.

가야사를 불태우다

천하 명당이라는 남연군의 묘소는 충남예산 내포(內浦; 가야산 주변의 10개 고을: 홍주 결성 해미 서산 태안 덕산 예산 신창 면천 당진)를 품고 있는 가야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의 지형은 바닷물이 뭍으로 파고들어 육지 속의 바다가 되는 곳이다.

가야산의 가야사는 고려 때 창건된 사찰로 왕실의 원당또는 동궁의 원당(훗날 왕이 될 세자의 원찰이라는 뜻)’으로 불리는 위세가 대단한 사찰이었다. 하지만 인조반정(1623)후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당한 광해군의 세자 이지와 세자빈이 땅굴을 파고 탈출하여 이곳 가야산으로 가려한 것이 밝혀졌다. 체포된 세자와 세자빈은 자진(自盡;자결)왕명을 받고 목매죽었다. 인조반정 이후 이런저런 이유로 가야사는 몰락하였다.

200여 년이 지난 뒤 가문의 부흥을 염원하던 흥선군에게 정만인이란 지관(地官)이 가야산 가야사 석탑자리에 묏자리를 쓰면 2대에 걸쳐 천자(天子; 황제)가 나온다고 예언해준다. 이에 흥선군은 전 재산을 털어 가야사 주지를 2만 냥에 매수한 뒤 가야사를 불태워 버리고 석탑을 부순 다음 그 자리에 부친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이장(1850)하였다. 친족들이 석탑 부수기를 주저하자 흥선군이 직접 도끼를 들고 부셔버렸다. 탑 속에서 백자 2, 덩어리 차(團茶; 단차)2덩이, 사리, 동 불상, 진주 등이 나왔다.

13년의 세월이 흐른 뒤 아들 명복은 조선 제26대왕(高宗; 재위1863~1907)이자 대한제국 1대 황제가 되었고 손자 척()은 대한제국 2대 황제(純宗; 재위1907~1910)가 된다.

대원군은 선친의 묘를 경기도 연천에서 한번 이장했었고 가야사 부근에 이장했다가 현재의 가야사 석탑자리로 이장하였다. 4번의 이장 끝에 찾은 명당자리 덕분에 천자가 둘씩이나 나온 것이다.

배종진/강서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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