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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305 호 | 기사입력 [2021-02-24] | 작성자 : 강서구보

일본군 대항에서 결사항전 준비 Ⅸ(끝)-강서향토사

17방면군의 전투준비

전세가 기울어짐을 절감한 일본은 19451월 통수권 조직을 개편하면서 조선군을 17방면군으로 개편하여 총력전에 대비하였다. 17방면군은 미군의 공격으로부터 조선을 확보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오키나와를 잃으면서 상황이 악화되자 일본은 미군의 본토공략이 눈앞으로 다가왔음을 직감하고 제17방면군에 7호 작전준비를 하달하였다. 이 작전은 본토 공격 이전에 한반도를 교두보로 미군이 진격해 올 것에 대비한 것이다. 제주도와 부산을 비롯한 마산, 여수 등 남해안 일대에서 집중방어하고 상륙부대에 적극적인 공격도 감행한다는 결사항전(決死抗戰)’의 전투준비를 뜻한다. 17방면군은 제주도부터 비행장을 확장하고 격납고를 건설하였다. 지상 결전을 위해서는 수많은 인공동굴과 땅굴을 구축하고 해변동굴에는 자살 특공정 부대를 배치하는 등 요새화 하였다.

대항 요새의 전투준비

전략적 거점인 가덕도 대항 일원에는 진해만 방호를 위하여 외양포 포대를 증강하였다. 이와 함께 대항 새바지에는 상륙군을 타격하기 위한 특공정 동굴(구보 제267호 소개)을 굴토하였다. 대항포구 북쪽 단애(斷崖)지역에는 진해만 입구를 봉쇄할 수 있는 인공동굴요새(구보 제303호 소개)를 구축하고 포대와 중()화기 배치 계획을 세웠으며 관측과 대공 감시를 강화하였다.

국수봉에는 새바지 해변과 대항포구, 외양포 포대를 엄호하며 화력지원이 가능한 보루(堡壘)진지를 구축, 해상과 해변의 상륙예상지점에 대하여 입체적인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일본은 이렇게 대항 일대를 완벽하게 요새화하고 이곳에서 결사항전을 준비하였다. 대항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면 유황도나 오키나와 전투와 유사하게 치열한 동굴전투가 벌어져 피아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평강의 해군비행장에도 비행기 격납고를 만들고 덕도산에는 항공기지 동굴요새(구보 제283~4호 소개)를 구축, 모든 군사시설을 지하 또는 갱도화 하는 최후의 전투를 준비하였다. 덕도산 정상부에는 3개소의 대공 포대를 배치하고 인근의 오봉산에도 고사포와 탐조등 진지를 구축하여 비행장 방호를 위한 입체적 화망을 구성하였다. 부산 주둔 육군 요새사령부는 미군의 공습에 대비하여 제151고사포연대를 부산항을 중심으로 일대의 산악지역과 구덕산 등에 배치하고 부산요새 중포병연대가 부산을 방호하였다.

미군의 폭격과 일본의 항복

전쟁 막바지인 194539일 밤 미군은 도쿄대공습(東京大空襲)’을 단행하였다. 일본의 전력 무력화와 전쟁 조기종결을 목적으로 일본제국의 심장부인 도쿄와 주변 일대에 대량의 소이탄(燒夷彈; 네이팜탄)을 투하하였다. 무려 6시간 동안 300여 대가 넘는 B29가 소이탄 총1,700t을 투하하였다. 목조건물이 대부분이던 도쿄 시가지는 불바다가 되고 20여만 명이 사망하였다.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의 원폭보다 직접피해가 더 큰 폭격이었다.

미군은 일본의 내지(內地)로 진격하기 위해 몰락작전(沒落作戰;Operation Downfall)’을 계획하여 규슈와 도쿄 인근 간토 평야지대를 점령하려고 하였다. 이런 계획을 수립하면서 미국이 가장 고심하던 것은 케츠고작전(決號作戰)’을 내세운 일본군과 민간인의 저항정도를 예상해 볼 때 수백만 명의 인명손실이 발생할 것을 우려하였다. 미국이 선택한 최종의 병기는 원자폭탄의 사용이었다. 전 국민을 죽음의 골짜기로 몰고 가던 일본은 원자폭탄 두 발을 맞고 저항 능력을 상실하고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피아 인명피해를 그 정도에서 그칠 수 있었다.

조선 땅의 태평양전쟁

도쿄대공습 이후 조선도 폭격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으나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은 일본의 일부가 아니며 종전 후에는 독립시킨다는 선언이 있었던 관계로 대규모 폭격이 어려웠다.

한반도 내에서 미·일 양국의 직접전투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으나 공습은 있었다. 미군의 B29 폭격기가 ‘45711~814일 기간 동안 18회에 걸쳐 부산, 대구, 원산, 함흥, 나진 등 항만과 철도, 군사시설 등에 소규모의 정밀폭격을 하였으나 인명피해는 경미하였다. 부산항 내에는 다수의 기뢰가 투하되어 항구의 기능을 일시마비 시킨 정도이었다.

한반도에서 미·일 간의 직접전투는 서해상의 울도(蔚島; 인천 옹진군)부근에서 있었다. 오키나와에서 출격한 미군의 B24 폭격기가 제주도 서해상과 울도 인근에서 일본 함선, 선박과 전투를 벌였다. 일본 선박은 4척이 침몰하였고 미군의 B24는 서해상에 추락하였다. 이 전투가 한반도에서 벌어진 유일한 전투였다.

연대봉(煙臺峯)은 알고 있다.

일본군은 매우 잔인하게 전쟁을 치렀다. 조선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는 더욱 광기를 부렸으며 전쟁 말기에는 자국의 국민들에게 까지 결사항전하고 자결할 것을 강요하였다. 저들의 인명경시사상(人命輕視思想)은 상상을 초월하게 하였다. 한반도 내에서 치열한 전투가 없었던 것과 대항에서 지옥의 동굴전투를 벌이지 않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일본은 전쟁 수행을 위해 조선인들을 강제 징용하여 공장, 탄광, 전선의 노무자 등으로 끌고나갔으며 젊은이들을 징병하여 전쟁의 총알받이로 전장에 투입하였다. 대항의 요새진지도 조선인 노무자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졌다. 통한의 증거물들이 바로 강서 일대에 산재한 일본군 군사시설이다.

가덕도의 주봉인 연대봉은 임진왜란(1592) 발발을 최초로 보고한 곳이자 왜군이 조선을 침략하는 것을 지켜본 역사적인 장소이다. 연대봉의 끝자락인 대항 일대는 러·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무려 41년간 일본군들이 주민을 쫒아내고 군사 요새화하면서 주둔하였다. 연대봉은 주민들이 강제로 쫓겨나고 징용자들이 저들의 요새동굴을 뚫어 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국가가 국력을 잃으면 국토는 쑥대밭이 되고 백성들은 노예가 되어 비참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연대봉은 앞으로 또 무엇을 보게 될지 모른다. 우뚝 선 연대봉은 어두운 역사의 흔적에서 오늘의 우리를 찾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강서향토사 연구소/ 연구위원 배 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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