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이 지나자 봄비가 대지를 적시고 있다. 이때쯤 되면 한해 농사 생각에 가슴이 설렌다. 텃밭에는 겨울을 이겨낸 마늘과 양파가 기지개를 켜고, 유채 봄동 상추가 따스한 봄 햇살을 기다리고 있다. 필자는 텃밭을 가꾸고 있는 도시농부다. 작은 텃밭임에도 자칭 ‘농부’라고 하는 것은 흙을 좋아하고 채소와 화초들과 잘 지내기 때문이다. 찌뿌듯한 몸도 텃밭에서 흙과 놀다 보면 어느새 상쾌해지고 가뿐해진다. 텃밭은 내 친구이자 힐링 공간인 셈이다.
어릴 적 봄이 되면 아버지를 따라 들로 나갔다. 내 손에는 항상 막걸리 주전자가 들려 있었다. 아버지는 밭을 갈기 전에 술을 한잔 뿌리며 한해 농사 신고를 했다. 그리고는 지게 작대기를 들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땅을 서너 번씩 툭툭 내리쳤다. 늦잠 자는 개구리나 벌레들을 깨워 피신을 시키기 위해서다. 쟁기질이 시작되면 흙은 마구 파헤쳐진다. 밭갈이를 하면서 다치는 생물들이 없도록 하기 위한 예방책이었다. 이른 봄에 밭을 뒤집다보면 흙 속에 있는 개구리들이 풀쩍 뛰어나와 놀라는 경우가 많다. 옛날 어른들이 참 지혜롭다는 생각이 든다.
텃밭은 20여 년 전, 낙동강 변에 있는 테니스장 옆 공터에서 시작했다. 서너 평 공간에 부추 상추 쑥갓 우엉을 심었다. 흙이 좋아 거름과 비료를 하지 않아도 잘 자랐다. 공을 치다가 잠시 짬을 내어 수확하는 재미가 컸다. 잘 키운 채소는 이웃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그 당시는 모두들 식구가 많아서 나눠주면 좋아했다. 요즈음은 나눠 먹을 이웃도 흔치 않다. 식구도 적지만 음식쓰레기 문제도 있고 해서 말을 꺼내기조차 어렵다. 이제는 꼭 필요한 것 위주로 조금씩 심는다.
해가 갈수록 농작물 가지 수도 늘고 면적도 늘어났다. 제대로 모습을 갖춘 것은 10여 년 전 강서체육공원 옆 ‘ㅈ농장’으로 옮기면서부터다. 20평에 일 년 임대료는 20만 원이다. 다른 농장에서 다 키운 김장 채소를 도둑맞은 후부터는 울타리가 있고 물이 공급되는 농장이 필요했다. 지인들은 20만 원을 들여서 왜 텃밭을 하느냐며 난리다. 그 돈이면 일 년 내내 먹고도 남는다면서 성화를 부린다. 그래도 텃밭을 하는 이유는 내가 키운 신선한 농산물과 함께, 돈으로 살 수 없는 여유로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텃밭에는 세 개의 두둑을 만들었다. 30여 종의 농작물과 꽃들이 자란다. 첫 번째 두둑에는 다년생 채소인 당귀 참나물 신선초 등과 상사화 꽃무릇 옥잠화 꽃창포 참나리 비비추와 같은 화초를 심었다. 텃밭에는 초봄부터 늦가을까지 온갖 꽃들이 피고 진다. 벌과 나비들에게는 잘 차려진 꽃밥상이 된다. 꽃그늘 아래에는 개구리 도마뱀 두꺼비 맹꽁이 가족이 산다. 가끔은 꽃뱀도 찾아와 놀다 간다. 다른 두둑에는 채소를 가꾼다. 봄에는 감자 고추 오이 토마토 케일 가지 모종을 심고, 상추 쑥갓 치커리 열무 씨앗을 파종한다. 여름이 다가오면 고구마 순을 잘라서 심고, 초가을에는 김장 무와 배추를 심는다. 늦가을에는 양파 모종과 마늘 종자를 넣고, 유채 봄동 상추 씨도 뿌린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연례행사처럼 진행된다.
농사를 짓다 보면 배우는 게 참 많다. 결실을 보기까지는 긴 기다림이 필요하다. 때맞춰 모종을 심고 씨앗을 뿌리고 꾸준히 관리해야 한다. 자라는 과정에는 적당한 물과 웃거름을 주고 병충해도 방지해야 한다. 어느 하나라도 놓치면 그 농사는 망치게 된다. 눈여겨 보면 자식 농사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도 든다.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에 너무 욕심을 내어서도 안되고 가만히 도와야 한다. 어린이가 있는 가정에는 텃밭 가꾸기를 권하고 싶다. 아이에게 인성과 인내심을 길러 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텃밭은 집 옥상이나 베란다 등에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쉽게 만들 수 있다.
요즘 들어서 지능지수(IQ), 감성지수(EQ)에 이어 ‘적응지수(AQ, Adaptibility Quotient)’가 주목을 받고 있다. ‘적응지수’는 변화하는 상황에 빠르게 적응하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이다. 급변하는 현대사회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능력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능력은 자연환경과 더불어 생활하며 체득하는 과정에 잘 형성되리라 본다. 텃밭과 더불어 지내는 사람의 일상은 늘 풍요롭고 행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