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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304 호 | 기사입력 [2021-01-22] | 작성자 : 강서구보

강서향토사-일본군 대항에서 결사항전 준비7

  • 도라 도라 도라

    작전개시 명령 암호 니타카 산에 올라라 1208’로 시작된 하와이 진주만 공습은 공격 성공을 알리는 암호 도라 도라 도라로 일단 종결 되었다. 선전포고 55분 전에 시작된 기습공습은 미 해군 전력에 큰 피해를 입혔고 미국은 즉각 선전포고를 했다. 진주만 공격은 미국민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비겁한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으로 불타올랐다. 미국 거주 11만여 명에 달하는 일본인들이 강제수용이라는 봉변을 당했다. 심지어 가쓰라 데프트의 밀약 이후 미·일 친선의 선물로 워싱턴에 심어진 벚나무까지 베어버려야 한다고 할 정도로 일본에 대한 적개감이 고조되었다. 미국은 개전 4개월 후 둘리틀 폭격대를 편성하여 도쿄와 나고야 등을 보복 공습해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전쟁이 시간을 끌면서 일본군은 전력을 회복한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을 견디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무리하게 전쟁을 이어 나갔다. 4년여의 전쟁 끝에 일본은 원자폭탄 리틀보이(little boy)’ 팻맨(fat man)’ 맞으면서 무조건 항복했다. 기습공습으로 전쟁을 시작했지만 단 2발의 원자폭탄으로 2개의 도시(히로시마, 나카사키)가 사라지는 결과를 맛보아야 했다. 공습으로 시작해 공습으로 끝난 전쟁이었다.

    도라 도라 도라는 공격 성공을 알리는 암호였지만 제국의 멸망을 불러오는 신호이기도 했다. 하버드 대학에서 유학을 했던 진주만 공습의 기획자이자 총지휘관인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가 예감한데로 잠자는 거인을 깨웠던 것이다.

    무너지는 일본군

    전쟁초기 일본군은 그들의 계획대로 서구 열강이 지배하던 동아시아 일대의 유럽 식민지를 하나하나 강탈해나가며 대동아공영의 허황된 꿈을 이뤄 나가는 듯 했다.

    개전 약 7개월 뒤 북태평양의 미드웨이 섬과 알류산 열도를 점령하려던 일본해군 연합함대는 미국 태평양함대와의 교전에서 항모와 정예조종사 대부분을 잃고 괴멸했다. 미드웨이 해전(19426)은 태평양전쟁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일본과 미국의 해군전투력은 대등(對等)하게 되었다.

    일본군은 미드웨이 이후 솔로몬군도의 작은 섬 과달카날에 조선인 노무자 수 천 명을 동원하여 비행장 건설을 하고자 했지만, 미 해병대가 상륙함으로써 솔로몬제도 작전은 실패했다. 설상가상 진주만 공습의 주역이자 일본제국 해군연합함대 사령장관이던 야마모토는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한 미군의 작전에 의해서 솔로몬제도의 부겐빌 상공에서 비행기가 격추(1943418) 당해 사망하게 된다. 전황변화의 계기가 미드웨이였다면 전세역전은 과달카날에서 시작됐다.

    미군은 실지를 하나하나 탈환하면서 일본 본토를 향해 진격하였고 동아시아전장에서도 일본군은 패배하기 시작하며 전쟁은 종말을 예고했다.

    유황지옥(硫黃地獄) 전투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2월 일본 영토인 오가사와라 제도의 이오섬(硫黃島;도쿄남쪽 1,080km)에서 벌어진 이오지마 전투는 원폭 투하의 도화선이 되었던 치열한 지옥의 전투였다.

    유황냄새가 진동하는 이오섬(19.1km²)은 가덕도(20.78km²)보다 약간 작은 화산섬이다. 하지만 이곳의 비행장은 일본본토를 공습하는 미군전투기 항속거리 내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일본은 개전 후 남방전선과 본토를 묶는 항공 수송 중계지점으로 이곳은 반드시 지켜야할 중요 거점이었다.

    19433월부터 수비대장 구리바야시 다다미치(栗林忠道) 중장 지휘 아래 22,500여 명의 일본군과 수 백 명의 한국인 강제 징용자들이 지하요새 진지구축(28km계획, 18km정도 굴토)공사를 했다. 지독한 유황냄새 때문에 방독면을 쓰고 작업을 했고 가스와 더위 때문에 수많은 징용자들이 죽어나갔다.

    38일 간의 전투에서 일본군 20,129명이 전사했고, 미군도 6,821명의 전사자와 28,686명의 부상자가 발생, 유일하게 미군의 피해가 일본군을 넘어선 지옥의 전투였다. 일본군은 구리바야시 중장 자결 후 소위 반자이도츠게키(萬歲突擊)’를 감행해 전멸했다. 대본영에서는 이를 옥쇄(玉碎; 명예나 충절을 위해 깨끗하게 죽음)하였다고 발표했다. 태평양 전쟁에서 가장 치열하고 많은 사람이 죽어난 전투가 이오지마의 유황지옥 전투였다.

    유황도 전투는 화력과 병력이 열세인 일본군이 동굴 속에서 은신하고 있다가 적을 최대한 근거리로 유인한 다음 공격하여 상당한 전투효과를 보았다고 판단한 전투였다. 이후 일본군은 오키나와를 비롯한 한반도 남단에 수많은 동굴을 구축하면서 결사항전을 준비했다.

    마지막 전투 오키나와

    이오지마에서 지옥을 체험한 미군은 본토와 더욱 근접한 오키나와에서 전투(19454~6)를 치른다. 일본의 오키나와 방어준비는 1944년 초부터 시작하여 증강된 3개 사단을 배치하고 동굴작전을 준비했다. 이오지마에서 지옥을 학습한 미군은 화염방사기로 동굴 속의 일본군을 섬멸해 나갔다. 일본군은 미군의 상륙을 최대한 저지하기 위해 카미카제를 동원, 자살공격을 감행했고 일본의 초거함 야마토도 이 전투에서 격침되면서 일본의 거함거포주의는 종말을 맞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도 영예롭게 죽기를 강요했다. 수많은 민간인들이 일본군의 강요에 못 이겨 희생됐으며 이곳으로 끌려온 조선인 징용자들도 전투 중 거의 사망했다.

    미국은 카미카제와 일본 최고의 전함까지 자살공격에 투입하는 것을 보고 일본을 전형적인 공격으로 항복시키기는 어렵다고 보았다. 유황도와 오키나와의 지독한 저항은 미국이 원자폭탄을 실전 투하할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이 전투는 태평양에서 미군이 일본군과 치른 마지막 전투가 된다.

    오키나와 전투 역시 유황도 못지않은 지옥의 전쟁이었다. 일본정부와 대본영은 본토방어의 전진기지를 상실한데 대해 크게 충격을 받았다. 본토에서는 국민 전부가 죽을 때 까지 싸우자는 일억총옥쇄(一億總玉碎)’ 선동까지 했다.

    배종진/강서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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