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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302 호 | 기사입력 [2020-11-23] | 작성자 : 강서구보

일본군 대항(大項)에서 결사항전 준비Ⅶ

열강이 된 일본의 야욕

임진왜란 시 정명가도(征明假道)’를 기치(旗幟)로 내세우며 조선을 침략했던 왜()1868년 메이지유신 선포 이후 일본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개항을 통해 신문물과 무기체계를 받아들이면서 군사력을 길러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했다.

러일전쟁 후 세계열강으로 진입한 일본은 조선을 합병했으며 조선반도를 중국 공략의 발판으로 삼고 중국을 넘보았다. 제국주의 확장에 앞장 선 일본 군부는 어떠한 전쟁에서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에 차 있었고 러일전쟁 승리를 되새기면서 사기가 충만해 있었다.

일본은 대한해협 전투 이후 해군력 증강과 거함거포(巨艦巨砲)주의로 군사력을 키워 나갔으며 서구 열강처럼 식민지를 확장하겠다는 망령된 야욕을 발산할 힘의 분출구를 찾고자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해만요새사령부 또한 승전고취 사업을 대대적으로 계획하여 전쟁의 기운을 극대화해 나갔다.

 

진해 일본해전 기념탑

일본군은 만주사변을 일으키기 직전인 러일전쟁 25주년(1929527)을 맞이해 외양포에서 창설, 규모를 확장해온 진해만요새사령부는 과거 러시아와 해전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한 것을 자축하기 위해 대규모 승전축하 행사를 기획했다.

진해함대사령부 중심지역인 제황산에 기함 미카사호의 선교(船橋)와 마스트(mast:돛대)를 형상화한 승전기념탑을 세우고 전면에 도고제독의 글씨로 일본해전기념탑(日本海戰記念塔)’라고 새겼다.

이날의 행사는 내각 대신들과 도고가 참석하는 대대적인 행사였다. 일본해군의 영웅 도고는 이때 직함이 원수백작(元帥伯爵, 당시 82)이었다(진해시는 이탑을 1967년 철거하고 9층의 진해탑을 다시 세워 시립박물관으로 사용 중임).

해군 가근거지였던 거제도 장목면 송진포리에는 러일전쟁 30주년(1935)을 기념하여 거제도 거주 일본인들이 송진포 뒷산에 8m 높이의 뾰족한 대형 러일전쟁기념비를 세워 전승을 기념하고 참배했다. 비문에는 출정을 앞두고 결의를 다진 도고제독의 글을 새겨 그날의 정신을 기리고자 했다(광복과 함께 파괴돼 돌다리로 사용되다 현재 거제시청서 보관).

 

포탄을 머리에 인 취도기념비

일본이 국제해군 군축조약을 폐기하고 군축협회를 탈퇴할 무렵 진해만사령부 사령관으로 부임(1935)한 고바야시 세이자부로(小林省三郞)중장은 전쟁 30주년 기념으로 함포사격 표적이던 취도(吹島)에 대형포탄 한발(305mm 함포탄:기함 미카사의 주력 함포)을 탑신 위에 올린 취도전승기념비(높이 2.5m)를 세웠다.

전면에 취도기념(吹島記念)’이라고 세기고 측면에는 해군 중장 고바야시 세이자부로를, 후면에는 취도회고(吹島懷古)’를 남겼다. 회고에는 러시아 함대 격파내용 등과 일본군 함대가 밤낮으로 맹훈련하여 승리했으며 해군 용사들은 취도기념비를 보면서 죽을 때까지 싸운다는 필승을 다짐한다고 기록(昭和十年八月)해두었다.

그는 전승의 기운을 함포사격으로 날려버린 표적에까지 세우고 기념하고자 했으며 겨우 흔적만 남은 취도는 전쟁이 끝난 뒤 두 번 죽는 아픔을 맛보아야 했다.

외양포 사령부 발상지 비

고바야시 사령관은 이듬해(1936)에 러일전쟁 승전 31주년 기념으로 가덕도 외양포진지 동쪽 언덕 병영시설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사령부발상지지(司令部發祥之地, 明治三十八年 四月二十一日 編成下命 同年五月七日 外洋浦上陸, 배면에 昭和十一年六月建之)라는 비를 세웠다.

선배들이 러일전쟁 준비를 위해 이곳에서 진해만요새사령부를 창설했던 것을 기념하는 비를 세우고 장병들의 자긍심을 고취시켰다. 이 무렵 일본은 국제군축협회를 탈퇴하고 무제한 전함경쟁(戰艦競爭)을 시작한 시점이었다(광복 후 기단은 파괴되고 비석은 부근에 매몰되어 있던 것을 강서문화원이 발굴해 현 위치에 옮겨 세웠다).

이러한 일련의 전승을 되새기는 행사와 조형물들은 일본군의 사기를 북돋워 주었고 승전의 자신감을 고취시키기에 더 이상의 교훈이 필요 없었다.

되살아 난 히데요시 망령

넘쳐나는 전쟁야욕을 주체할 수 없던 일본은 가도(假道)하지 않고 통째로 삼킨 조선반도를 발판으로 중국과 충돌을 자행했다.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시작된 중국공략은 상하이를 침공해 점령했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푸이를 내세워 관동군의 위성국가인 만주국(滿洲國)을 수립(1932)하기에 이른다. 관동군은 만주통제권을 확보한 다음 중국내륙 진출 준비를 완료했다.

이어서 중일전쟁(1937)을 일으킨 일본은 당시 중국의 수도이던 난징(南京)을 공습하고 항저우(杭州)에 상륙하였다. 난징에서는 포로와 양민 30~100여 만 명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난징대학살을 자행했다. 또 중일전쟁 수행을 위해서 국가 총동원법까지 공포하며 중국 공략에 매진했다.

실로 345년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꿈꾸었던 정명(征明征中)의 길로 들어선 것이었다.
일본은 중국뿐 만이 아니라 자원확보를 위해서 남방으로 눈길을 돌렸다. 일본의 전략가들은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석유 매장량이 일본에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인도차이나,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동남아 국가로 세력을 확대하면서 허울 좋은 대동아공영권(大同亞共榮圈)개념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이러한 일련의 남방계획은 경제적, 군사적 자원 확보를 위해 매우 중요했지만 이들 지역은 모두 서방국가들의 식민지였다.

남방계획은 미국과의 충돌이 불가피했고 일본 지도층은 미국과 전쟁을 불사하더라도 남방계획을 완수하고 대동아 공영권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판단한 배경에는 청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경험을 기초로 강대국을 꺾을 수 있다는 자만심과 강경하고 사기왕성한 군부가 있었다.

세계 2차 대전이 발발(1939)해 유럽 여러 나라가 전쟁을 치르고 있는 어수선한 시점에 서구열강의 아세아 식민지를 빼앗자는 일본의 계략은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공격(1941127)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배종진/강서향토사연구소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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