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가을이 시작된다는 백로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진다는 추분도 지났다.
두 번의 큰 태풍이 뜨거운 공기를 저만치 밀어냈는지 아침 저녁으로 피부에 와 닿는 바람의 기운이 한결 상쾌해졌다. 아니 약간은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차가워졌다.
지난 여름은 코로나19에다 긴 장마와 무더위, 태풍으로 우리 모두 힘들게 보냈다. 참 그러고 보면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가 보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쉬이 잊힌다. 누구 말마따나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인가.
강서 들녘도 이제 차츰 누렇게 황금색으로 채색되고 있다. 조금 지나면 땀 흘린 수고를 거둬들이는 농부들의 바쁜 몸짓을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들판을 감싸고 있는 짙푸르던 산자락도 녹음이 차츰 옅어진다. 벌써 가을이란 계절에 맞는 ‘가을가을한’ 옷을 갈아입고 있는 것 같다.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가, 가로수도 하나 둘씩 힘없이 잎사귀를 떨군다.
문득 지난 밤 선잠을 자고 난 뒤 아련하게 생각나는 꿈같이 생각된다. 우린 분명 올해 초부터 좋지 않은 꿈을 꾸고 있다. 긴 장마와 무더위, 몰아치던 태풍의 어두운 밤은 지났지만 아직 저 물괴같은 코로나19는 여전히 우리 삶을 위협하고 있다.
안 그래도 우리네 인생살이는 팍팍해져만 가는데 코로나19로 더 건조무미해지고 있다. 어쩌자고 세상은 자꾸 이렇게 힘들어 지는지 모르겠다. 어떤 이는 인생은 약간은 몽환적이어야 재미있다고 했는데. 우리네 생활은 지극히 현실에 매달려 댕강거린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그의 명상록에서 ‘인생이란 젊은이의 눈에는 끝없이 긴 미래로 보이며 늙은이의 눈에는 지극히 짧은 과거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인생이 극히 짧다는 사실을 알려면 장수한 늙은이가 돼 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인생의 모든 일은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꿈과 같이 덧없이 느껴지고 허무와 무상이 뚜렷이 눈에 보여 마음에 스며들기 때문일 것이다.
잡다한 생각으로 헝클어진 머릿속을 정리하는 데는 산책이 최고다. 그런데 우리의 도시는 걷기가 참 불편하게 조성돼 있다. 차를 몰고 바다와 맞닿은 강 하구를 찾는다. 가을 속 강가에서 보는 풍경은 카메라 렌즈 속같이 또렷하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하면 진목마을 ‘카페 미루’에 들러보자. 약간의 기다림을 견디고 드립 커피를 마셔본다. 그 알싸하고 진하고 풍부한 향에 마음을 뺏기면서 새로운 커피의 세계가 열린다.
이 카페는 웬만한 커피 종류는 모두 있고 직접 로스팅한 뒤 숙성한 원두를 갈아서 내려준다. ‘커알못’이라도 원래 커피맛은 이래야 된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