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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300 호 | 기사입력 [2020-09-24] | 작성자 : 강서구보

강서향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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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해군 북극곰 사냥

희망봉을 돌아 반년 넘게 지구 반 바퀴를 돌아오는 항해를 시작한 러시아 발틱함대는 중국 상해에서 증기선 연료인 석탄을 공급받고 북상한다. 그러다 일본해군 정찰함 시나노마루호에 발견되었고 시나노마루는 기함에 타타타타타0445’ 암호 무전을 날린다.

러시아 함대가 대한해협 쪽으로 북상할 것으로 판단한 도고의 연합함대는 1905527일 오전 505우련(형태가 약간 보일 듯 희미함)을 기해 기함(旗艦;사령관이 타고 있는 군함) 미카사(三立)호를 선두로 대기 중이던 가덕도 외양포 앞바다에서 출동했다.

최고의 준비된 전투력을 갖춘 도고의 연합함대(99)는 미카사호에 Z’(황국의 흥패가 이 전투에 달려있다. 각 대원은 한층 분발하라는 뜻)를 게양하고 발틱함대와 제주도 인근 해역에서 교전을 시작, 대한해협을 거쳐 올라 와 울릉도 근해에서 발틱함대를 완전히 괴멸시켰다.

일본함대는 그 동안의 해상 기동훈련을 통해 공격 위주의 최적화된 전술역량과 고도의 함포 사격술, 폭발력 높은 개량된 시모세(下瀨; 시모세 마사치카 공학박사 개발)화약과 불발탄을 획기적으로 줄인 이주인(伊集院; 이주인 해군대좌 개발) 신관으로 화력의 우세를 점했다.

또한 36식 무선전신기를 이용한 우수한 통신망으로 발틱함대의 기동을 연합함대에 신속하게 전파했다. 여기에 청일전쟁, 여순항 봉쇄작전 등을 치른 백전노장의 지휘관들과 자신감에 충만한 고도의 숙련된 승조원이 있었다.

장기간 항해로 누적된 피로에 지친 러시아함대는 제대로 된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하였고 지휘관인 로제스트 벤스키 장군의 기함이 피격되면서 전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발틱함대는 전함 38척 중 21척이 격침되고 5,000여명의 전사자와 부상당한 로제스트 장군을 포함한 약 6,100명이 포로가 되었다. 대마도 인근 해역에는 러시아 수병들의 시신과 생존자들의 아비규환이 이어졌다. 반면에 일본군은 3척의 수뢰정 손실과 120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그날 오후에 시작된 전투는 다음날 오전 10시에 울릉도 근해에서 종료되었다.

보물선 돈스코이호

러시아 순양함 드미트리 돈스코이호는 울릉도 남방해역에서 일본함대에 포위되자 함장이 배수판(排水板)을 열어 고의자침(故意自沈)하였고 생존 수병들은 울릉도에 상륙하여 항복했다.

당시 세계 최고의 해군력을 자랑하던 러시아 함대였지만 고도의 전투력과 우세한 화력을 갖춘 일본해군의 기습적인 공격을 당해낼 수 없었다. 대한해협 전투는 일본군 스스로도 놀란 일방적인 대첩(大捷)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자침한 돈스코이호가 보물선(금화 5천 상자 적재)으로 알려지면서 일본이 인양(1916)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당시 러시아함대는 금화, 금괴 같은 것을 배에 싣고 다니면서 세계 각지에서 보급을 받고 장병들의 급료도 금화로 지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우리나라의 도진실업(1981), 동아건설(1998)이 착수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것을 신일그룹(2018)이 대대적인 홍보(인양 시 시가 150조원 상당)와 자금모집을 통해 인양을 하려 했으나 사회적 물의만 일으킨 채 마무리 되었다. 돈스코이호는 영원히 뭍으로 나오지 못하는 전설의 보물선으로 울릉도 바다 속의 주인공이 될지도 모른다.

일본 열강반열에 등극

러시아는 대한해협 전투 이후 급격한 전력상실과 국내정치 사정 등으로 더 이상 전쟁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고 일본 역시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국력이 소진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미국의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중재를 요청, 미국의 주선으로 뉴햄프셔주에 있는 군항도시 포츠머스에서 강화조약(19059)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러시아제국이 만주와 조선에서 철수하고 일본은 남 사할린을 할양(割讓)받아 승자로서의 체면을 지키면서 러일전쟁은 종료되었다.

이 조약은 일본의 승리를 확인해 주었으며 동아시아 제1의 강국이자 세계의 열강으로 인정하게 된다. 특히 대한제국 독점권을 열강으로부터 인정받고 을사늑약을 강요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며 만주 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대한제국은 러시아와 맺은 모든 조약, 협정을 파기하고 을사조약(190511)을 체결 외교권을 박탈당한 채 일제의 고문정치를 받아들여야 했다. 이후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에 이어 군대를 해산하고 급기야 한일 병합조약(19108)을 맺어 주권이 박탈되고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러시아는 전쟁의 와중에 피의 일요일 사건을 겪으면서 러시아혁명의 기운이 확산되어 가고 있었다. 전쟁으로 기력이 다한 러시아는 볼셰비키혁명(1917)으로 제정 러시아가 사라지고 소비에트공화국으로 넘어가게 된다.

미국은 포츠머스 회담 중재 이전에 가쓰라데프트 밀약(19057)’을 통해 일본의 한반도 진출과 미국의 필리핀 진출을 상호 인정했다.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 조약을 성사시킨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1906)했다.

국가존망이 걸린 전쟁

러일전쟁은 일본이 국가의 존망을 걸고 한판 승부를 걸었던 전쟁이다. 무모해보이기까지 했던 전쟁의 승리는 일본 근대사에 변곡점이 된 역사적 사건이며 건곤일척(乾坤一擲)의 혈투였다.

단연코 전쟁의 주역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1847~1934)제독이었다. 육군에서는 여순요새 공략과 봉천전투의 승리자 노기 마레스케(及木希典 1849~1912)장군이다. 노기는 여러 가지로 불리한 상황에서 러시아군을 물리친 역전의 명장이었다. 러일전쟁은 이 두 사람의 전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의 3대 성인으로 추앙받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의 국가체계를 세운 성인이라면 도고와 노기는 전쟁으로 일본근대사를 새롭게 쓴 영웅이었다.

러일전쟁을 계기로 도고와, 노기는 세계적인 명장으로 떠올랐고 해군력 증강에 중점을 두었던 일본은 군사대국으로 발돋움하며 세계사를 흔드는 제국주의 열강으로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 배 종진/ 강서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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