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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299 호 | 기사입력 [2020-08-24] | 작성자 : 강서구보

강서향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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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전투편성

러일전쟁 개시 6개월 정도 지난 시점에 시작된 외양포 비포공사는 28유탄포(珊榴彈砲;일본식 표기) 포상 공사와 병영시설 구축이 핵심이었다. 하지만 외양포 북포대(北砲台, 2輕砲台), 남포대(南砲台, 輕砲台), 산악보루, 탄약고, 관측소 등이 함께 배치되는 전술 공사였다.(포대의 자는 의 일본식표기)

외양포를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의 경포대 진지 흔적은 영구화 시설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러일전쟁에 대비한 야전형(野戰形) 포진지로 판단된다. 산 능선자락에는 굴토된 진지터와 포상의 흔적인 방벽(防壁)과 교통로 등 포대가 주둔한 흔적이 선명히 남아있다. 경포대는 31식야포(구경 75mm, 사거리 8,550m, 발사속도 분당 15)가 배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위력은 좋으나 발사 속도가 느린 대구경 280mm 유탄포의 시간적 공백을 메우는 화력으로 운용되었다.

외양포 마을과 이곳을 둘러싼 국수봉(264.4m) 산자락 일대는 최단기간 내에 요새포병부대 기지(基地)로 변모해 주둔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군 포병부대의 외양포 진주(進駐)는 본토의 제12사단 요새포병연대를 모체 부대로 하여 편성된 포병 2중대가 19041212일자로 먼저상륙하고, 8일 뒤 제4사단 요새포병연대를 모체부대로 편성한 중포병대대(重砲兵隊隊)본부와 1중대가 저도(猪島)를 거처 외양포에 상륙(20)함으로써 외양포 포대(중포병대대) ‘전투편성(戰鬪編成)’ 완료되었다.

19041015일 러시아 발틱함대에서 재편성된 제2, 3태평양함대(통상 발틱함대라 칭함)가 발트해 해군기지를 출항한 뒤 주력인 제2태평양함대가 희망봉을 돌아 극동으로 이동해오자 시간을 번 일본군은 진해만 방어에 큰 비중을 두었고 독자적인 지휘계통을 확보하기 위해 본토의 제4사단에 진해만 요새사령부 편성을 명령하였다. 편성이 완료된 요새사령부는 190557일 외양포에 상륙, 요새포병대대를 지휘하고 진해만 일대의 방어를 담당하였다.

 

대한해협 전투준비

완벽하게 방어진지 구축과 전투편성을 완료한 외양포 요새사령부와 일본군 해군은 러시아함대가 베트남 캄란만에서 합류하여 북상해 오자 전투준비 태세에 돌입했다. 요새사령부 창설에서 불과 20일 뒤에 대한해협 전투가 벌어진 것으로 보아 주야로 실전을 방불케 하는 맹훈련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외양포 포대는 최대 사거리 8km 내외의 표적에 대해 짧은 시간에 엄청난 양의 포탄을 사격한 것으로 보인다. 유탄포(榴彈砲:내부에 다져 넣은 작약의 파열력을 이용하는 대포)는 사거리에 따라서 작약 사용량이 조절되는데 사거리가 짧으면 작약을 줄인다. 이때 폐기되어 타용도로 활용되던 잉여작약 조각이 방파제 공사 이전 까지만 해도 해변의 자갈 속에서 쉽게 발견되었다. 지상사격 표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가덕도 남방 형제도 부근 또는 가상표적인 부표 등을 띄워 탄착점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해군 역시 기동훈련과 함포사격술 연마에 사력을 다하였다.

 

통한의 칠천량(漆川梁)

일본군 해군은 거제도 송진포에 해군 가근거지(假根居地)를 만들고 함대를 주둔시켰다. 송진포는 가덕수로 초입(初入) 거제도 본섬의 동북쪽 끝자락 포구이며 칠천도(漆川島)를 마주하고 있는 수로이다.

함대를 은닉하기에 좋은 진해만의 입구 격으로 외양포 앞바다를 통해 신속히 외해(外海)로 빠져나올 수 있는 지점이다. 또한 임란시 축성한 송진포 왜성을 중심으로 영등포 왜성, 장목 왜성이 가까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칠천량(漆川梁)은 정유재란(1597.7.17.) 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의 조선수군이 이곳에서 진을 편성하고 휴식하다 왜군수군의 공격을 받고 함대가 괴멸(壞滅)된 곳이다. 전라우수사 이억기를 비롯한 백전노장의 장수와 군졸 1만여 명이 전사하고 거북선과 판옥선 등 함선 170여 척을 모두 잃어버렸다. 원균도 고성방면으로 탈출하다 왜병에게 목숨을 잃었다.

다만 경상우사 배설이 12척의 배를 끌고 도피(逃避) 및 탈출(脫出)’에 성공하여 한산도로 향하였다. 백의종군 길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를 제수 받은 이순신 장군에게 선조 임금은 수군을 해체하고 육군에 합류하여 싸우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장군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 나아가 사력을 다해 싸운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出死力拒則猶可爲也이하 생략)라는 장계를 올렸다.

전력을 재정비한 장군은 최악의 조건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명량대첩(鳴梁大捷)으로 조선의 남쪽바다를 지켰다.

조선수군이 괴멸한 칠천량은 우리에게 뼈아픈 슬픔이 배여 있는 통한의 바다이지만, 왜군수군에게는 이순신에 의해 연패하며 절치부심(切齒腐心)하던 치욕을 한 번에 털어버린 유일한 승전지이다.

일본군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사령관은 이곳을 거점으로 하여 수없이 해상 기동훈련을 하여 대한해협 일대의 바다를 익혔고 그들의 선조가 칠천량 해전에서 승리한 정기(精氣)를 이어받아 러시아 함대를 제압하겠다는 각오로 전투준비를 하였다.

사라진 독수리섬(鷲島)

해군 함포의 사격표적은 거제시 사등면 가조도 북단 1km 전방의 돌섬인 취도(吹島)였다. 취도는 원래 취도(鷲島;독수리 섬)로 면적 1,884(570)의 돌섬이었으나 일본군의 함포 표적이 되면서 취(;불취)도가 되었다고 한다. 포탄으로 이 섬을 불어내겠다는 의미로 바꾸어 부른 것인지도 모른다.

일본해군 기함(旗艦) 미카사(三立)의 경우 연간 사용할 수 있는 포탄이 18,000~19,000발 정도지만 평시 30~40%는 익년(翌年;다음해)으로 이월한다. 하지만 러시아 함대와 교전을 준비하면서 무려 3만 발의 포탄을 주야 가리지 않고 사격했다. 전체 전함을 계산하면 실로 엄청난 포탄 수다. 1905년부터 1918년 사이에 함포사격으로 이 돌섬의 80%가 파편이 되어 바다 속으로 사라지고 지금은 독수리가 날아들 수 없는 상처투성이의 돌덩이만(50평 정도) 남아 있다.

섬 하나를 집어삼키며 최고의 전투력과 포술을 연마(練磨)한 도고의 연합함대는 송진포를 빠져나와 외양포 앞바다에서 러시아 함대의 기동방향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배 종진/ 강서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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