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유래

  • 역사·문화
  • 문화탐구
  • 지명유래
  • 글자크기 크게조정
  • 글자크기 작게조정
  • 본문인쇄

지명유래

녹산동

녹산이라는 지명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는데 녹산을 처음에는 녹산(鹿山 )이었는데 녹산(菉山 )으로 고쳤다는 설이다. 즉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봉화산의 동쪽은 굶주린 사슴이 들판을 달리는 모양인 기록주야형의 명당이기 때문에 녹산이라 하였다고 하나 녹산(菉山 )이라는 지명은 녹두처럼 작은섬인 녹도(菉島 )에서 연후한것을 봄이 타당하다. 그것은 녹산이라는 지명에 앞서 녹도가 여지도서의 김해부지도상에 표시되어 있고 조선왕조실록 순조 11년의 염전 관계기사에서도 명록양도라고 하여 녹도라는 지명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여지도서 단계까지는 조그만 일개 섬이었던 녹도가 계속되는 낙동강 하구의 삼각주 발달로 인하여 서서히 육지로 변모되는 추세속에 놓여 있었으며 19세기 초반 이후는 비록 섬으로 기록되기는 하였으나 명지도와 더불어 염전이 상당히 성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미 육지와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자세히 보기

녹산동 지명유래
동 명자연마을명유 래
녹산동옥포 (玉浦) 옥포는 원래 웅동면 가동리에 속해 있었다. 옛날 가락국때 허왕후가 수로왕에게 시집을 오면서 배에서 내려 지나간 곳이므로 님개라 하였는데 그 아래 옥포 본마을이 있고 동쪽으로 옥포와 신촌사이, 구랑으로 가는 길에 띠말등 마을이 있다.
신촌 (新忖) 가구수 20여호의 신촌마을은 새 마을로 더 알려져 있다. 70년전 국도의 북쪽에 3호이던 마을이 차츰 지금과 같이 부락을 형성하였다.봉화산 뫼뿌리의 한가닥이 서남으로 뻗어 내린 기슭 자리에 형성된 골짝마을이지만 서남으로펼쳐진 들과 그 너머 바다의 아름운 낙조를 보고 사는 마을이다 마을입구에 200여년 된 소나무가 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송정 (松亭) 창원시와 경계를 이루는 지난날의 녹산면 송정리는 옛날 바닷가에 소나무숲이 울창했다는데서 이름이 유래하나 약 400여년 전에는 마을이 형성되면서 서서히 이 솔숲은 없어지고 지금은 소나무 두 그루만 남아 있어 조부송 조모송으로 불리고 있다.
방근 (芳根) 송정리의 동쪽에 있는 방근마을의 옛이름은 마금당이라 불러왔다. 마금당이란 국수산신위를 모시어 매년 정월 보름께 동제를 모시는 당사의 이름에서 온 말이다.
화전 (花田) 보통 서구지라고 이름 부르고 있는 이곳은 청룡이 꼬리를 돌아보고 있는 모양의 천석군 명당자리로서 대대로 효자열녀가 나오고 천석군이 끊이지 않는다고한다. 서구지는 지금의 성고개가 옛날의 금단곶보로서 곶이가 고지, 구지로 불리어졌고 고 곶이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해서 서곶이 서구지가 되었다. 화전이란 이름 역시 곶이가 꽃으로 변해 그 한자 이름 화전으로 바뀌었는데 서구지의 서쪽 골짜기는 재맹이골이라고 한다.
사암 (四巖) 화전리 남쪽 해안에 큰 바위 넷이 있어 사암으로, 너암이라 부르는데 선바위, 탕건바위, 입천바위, 등잔바위의 네 바위에서 유래한 너바위가 옛 이름이다.
산양 (山陽) 옛 이름 이곶리로서 이꼬지라 불렀고 산을 등지고 있는 양지바른 곳이기 때문에 산양이란 이름이 생겨났는데 성고개에 금단곶보가 있었다. 마을 뒤로 일화산 오르는 길 왼쪽에 저수지가 있고 저수지 위는 옛날에 절이 있었다고 하여 분당골이라 부른다.
녹산 (菉山) 원래는 사슴 녹자 녹산이었다. 굶주린 한 마리 사슴이 푸른 들을 향해 내리뛰는 모습의 기록주야형의 명당자리라 하여 녹산 이라고 한 것이다. 본 녹산과 산양마을과 성산마을을 병합해서 1714년 녹산리라고 했다.
성산 (星山) 성산은 녹산의 관문으로서 녹산 제1의 마을이다. 서낙동강이 바다로 흘러가는 목이 되는 곳으로 녹산다리와 함께 바다와 강을 지키고 있다. 1950년대 개설된 녹산동 5일장은 부산~진해 를 잇는 관문으로서 서낙동강과 남해 바다가 맞닿는 요충지라는 배경에 힘입어 김해 일대 에 형성된 재래시장 중 김해읍장 다음으로 상권이 크게 번성하였다.
장락 (獐洛) 태백산맥의 한 줄기가 장강을 만나 정벽을 이루어 그 달림을 멈추어 선 곳이 장락포라고 한다. 옛날에는 산줄기가 강가에 와서 절벽이 되어 노루가 달려오다가 떨어졌다고 해서 장락포라고 한 것이다 조만강과 서낙동강이 만나는 이곳은 옛날엔 순아도를 건너 하단, 구포로 이어지는 장락포 나루터가 있었다.
생곡 (生谷) 옛 이름은 태야면 생활리였는데 1914년 생활리와 중곡리가 합쳐져서 생곡리가 되었다. 봉화산이 양팔을 벌려 왼쪽은 천마산이 되고 오른쪽은 의성봉, 장락포로 이어지는데 이곳에서는 구랑으로 가는 메티고개와 성산으로 넘어가는 소불등 고개가 있고 갈대밭에는 범방리 가리새로 가는 생곡나루터가 있다.
가달 (加達) 생곡에서 중곡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학배등 고개마루다. 이 학배등은 학이 먹이를 잡으려고 들판을 보고 목을 빼는 형상을 하고 있고 이 산 아래 도로가에 있는 마을로서, 강가에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가달이 되었다.
중곡 (中谷) 봉화산 큰 줄기가 태야 벌판을 보며 오다가 천마산과 비마산으로 뻗어 내리고 있다. 중곡은 이 천마산과 비마산 깊은 골짜기의 중간에 소쿠리 안쪽 대숲으로 둘러싸인 본마을이 있고 녹지소가 있는 세산다리까지가 중곡 삼거리에 속한다. 옛날에는 마을앞이 바닷가로서 들이 좁았기에 지금도 도로 너머 들판 이름을 한섬직이 방안이라고 한다.
마음 (馬音) 하늘말이 울부짖는 모습인 천마시풍형의 명당자리가 있는 곳이라 마을이름이 마음으로 되었다. 천마산은 무과와 판서가 끊이지 않는 땅이라고 하여 동쪽에 있는 목마른 말이 시내를 달리는 형국인 갈마분계형의 명당으로 과거급제자 12인과 거부가 나올 곳이라고 전하고 있다.
구랑 (九朗) 예부터 태야면의 중심지였고 지금도 60년 전통의 녹산국민학교와 녹산동사무소가있는 곳으로 1914년 소압리를 병합했다.
압곡 (鴨谷) 압곡의 옛이름은 압실이다. 한마디로 압곡이라고도 하나 압곡은 대압과 소압, 잠뫼, 송곡, 등 4개마을로 형성되어 있고 보개산 아래에 흰 오리가 아래로 내려온 백압하가형의 명당이 있기 때문에 백자천손이 조정에 가득 찰 것이라고 전해진다.
명동 (明洞) 보개산과 명월산이 계곡을 이루어 내려오며 유명한 명월사(흥국사)가 있고 그 아래로 지사천을 만나는 지점에  명동이 자리한다. 지리 풍수설에 의하면 마을 북쪽에 구멍이 나 있는 높은 바위가 있는데 그 앞의 누워 있는 바위에 등불을 단 모양의 괘등형 명당이 있어 자손이 부하고 장상이 나온다는 자리가 이곳 명동이다
지사 (智士) 녹산동의 가장 골자기에 있는 마을로서, 이름 높은 선비가 글을 읽고 있는 고사독서형의 명당자리에 있다 하여 지사란 이름이 생겼다.서쪽 너더리 고개를 넘어 웅천으로 이어지고 남쪽 두동고개를 넘어 웅동으로, 북쪽은 곰이나 산돼지가 출몰했다는 곰티고개를 넘어 장유로 빠져 나갔다. 지사의 남쪽엔 양산곡이 있고 동쪽에 장자곡이 있다.
신명 (新明) 보개산이 남으로 솟아 이 골짜기에서 흘러 나온 물이 마을 앞을 가로질러 흐르는 냇물 이름을 ‘저 만 큰 도랑’이라 불렀다. 저 만은 저마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신명마을 이름을 부를 때 저만, 저마이라고 표한하고 있다. 신발산아래에 1870(고종7년)에 평산신씨 10호가 이주하여 살면서 생긴 마을이다.
세산 (細山) 마을 독뫼 이름이 서산인데 세산이란 이름은 이 서산에서 왔다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늙은 쥐가 밭으로 내려오는 노서하전형으로 당대에 만석을 할 명당이라고 했다. 태야면 세산리였는데 1914년에 미음리에 병합되었다.
미음 (美音) 미음은 미음곡 즉 미음실이다. 본래 태야면의 면사무소는 이곳 미음실에 있었고 일제 때는 야학교가 있었다. 미음실의 미음이란 풍수지리설에 풍상산아래에 화동이 피리를 부는 화동취적형명당이 있어 문과오방에 이판서가 날자리라고 전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고 이음이라 불렀다고 하고 또 가난한 한 어부의 노모가승천하면서 노모의 목소리가 아름다운 풍악소리와 함게 들려 왔다고 하여 미음이라고했다는데 노모의 치맛자락이 바람에 휘날렸다는 풍상산의 전설이 전해온다.
분절 (粉切) 분절마을은 분전, 분즐이라고 하며 옥녀봉 동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옥녀가 금병풍 둘러치고 앉아 머리를 풀고 마을 앞 우물에 얼굴을 비추고 마을건너 빗골의 빗으로 머릴르 빗질 한다는 옥녀봉 전설에 따라 가루 분자와 빗 즐자를 쓴 분즐이 지금의 이름으로 되었다고 한다.
와룡 (臥龍) 분절의 동북쪽 고개 밑에 있는 마을로서 옆 산이 마치 용이 누워서 꿈틀거리는 것같은 모양이기 때문에 와룡이 되었다. 본래 태야면 상용리였으나 1914년에 미음리에 합병되면서 이룡이 바뀌어 와룡이 되었다
탑동 (塔洞) 태야면 탑동리였는데 1814년에 범방리에 병합되었다.  뒤산이 금병산으로 그 아래의 폐사지 자리의 잡초속에 고려시대 것으로 보이는 3층석탑이 외롭게 서 있었기에 탑동으로 불리고 있다.
장전 (長田) 탑동과 범방사이에 길다랗게 생긴 밭이 많은 마을이라 하여 이름이 장전이다.앞들은 대우지, 물간, 성성개라 부르며 지금은 녹산의 특산물인 미나리 재배로 소득을 올리고 있다.
범방 (凡方) 옛날 배가 가는 행주형의 명당이 있기 때문에 범방리였는데 범방리로 고치고 1914년 탑동리를 병합하였다. 남쪽은 거의 갈대밭이었는데 해방 후 차츰 개간되어 농지가 되었다.금병산을 결계로 하여 장유면 수가리와 등지고 있는 범방 본마을과 대밭이 많은 죽곡으로 이루어 져 있는데 선사시대 이래 이곳에 사람이 살아온 흔적이 범방패총으로 남아있다.
사구 (沙邱) 조만강변의 모래 언덕에 생겨난 마을로서 사구라는 이름이 되었는데 일명 모래구지라고 한다. 조만포에서 남으로 조만강을 따라 길게 장락으로 이어지는 가리새 들까지가 사구에 포함되는데 조만포쪽으로 넘어가는 등대고개가 있다
신호 (新湖) 바다 가운데 새로 생긴 섬이라고하여 신도라 했고 명지면 신전리에 속해 있다가 1914년에 신호리가 되었는데 1967년 간척공사로하여 사암에서의 뱃길이 없어지고 육지와 이어져 녹산면에 속하게 되었다.해방 전후까지 이곳에는 염전으로 유명했고 마을 앞 바닷가에는 해송이 일렬로 늘어서 있어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 내었는데 홍개를 건너서면 둘레 30리길의 모래섬 진우도가 있다.
녹산 동네이름과 마을이름
녹산동 ― 녹산 성산 산양 송정동 ― 송정 신촌 방근 옥포
화전동 ― 화전 사암 생곡동 ― 생곡 장락 가달 중곡 마음
구랑동 ― 구랑 압곡 잠봉 송곡 범방동 ― 범방 탑동 가동 사구 죽곡
지사동 ― 지사 명동 신명 미음동 ― 미음 분절 와룡 세산
신호동 ― 신호
사진

녹산에는 산이 있고 들이 있고 강이 있고 바다와 섬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고장으로서, 선사시대의 유적과 가야문화의 향기가 곳곳에 서려 있는 역사의 고장이다. 동으로 낙동강이 구비 돌고 서쪽에 강서 제일봉인 보개산이 솟아 있으며 북으로 금병산이 둘러치고 그 안에 기름진 태야벌이 펼쳐진다. 그 중심에 횃불이 타오르던 봉화산이 있고 남해바다의 파도와 만나는 곳에 진우도가 있다.

녹산동은 서낙동강을 동쪽 경계로 하여 그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굴암산에서 흘러내려 옥녀봉과 금병산, 범방대로 이어진 산맥을 경계로 하여 김해군 장유면의 율하리와 수가리, 서쪽으로는 역시 굴암산에서 서남으로 내린 산제를 따라 마봉산의 너더리고개와 두동고개를 지나 보개산에서 지형이 낮아지면서 옥포, 주포사이의 큰 내를 따라 진해시 가주동과 경계하고 남쪽으로 바다 건너 가덕도와 마주친다. 지형상의 특이점으로는 녹산동의 중심에 자리한 봉화산 줄기를 따라 서쪽에서 동쪽으로 산세가 이어지면서산의 남쪽과 북쪽으로 구분되어 옛날부터 여러가지 면에서 생활의 대조를 이룬 곳이다. 산세의 북쪽인 옛 태야면(생곡, 구랑, 지사, 미음, 범방)사람들은 농사를 주업으로하는 반 촌으로 성품이 순박하고 예절 바르고 조용하고, 녹산면(송정, 화전, 녹산, 신호)사람들은 바다와 강을 끼고 있어 어업과 염전, 밭작물을 주로 했고 또 도로와 교통이 일찍 열려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아 다른 지역 사람들을 접할 기회가 잦아 인정의 샘이 깊고 성품이 활달하고 진취적인 편이다.

사진

녹산동은 1989년 1월1일에 경상남도에서 부산직할시에 편입되었으나 50.42㎢의 광활한 면적이 신호와 지사동을 제외하고는 전 지역이 개발제한구역(G.B)에 묶여있어 여러 가지 면에 서 아직도 농촌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형적으로는 낙동강 하구의 삼각주가 발달되어 형성된 신호와 진우도, 사암과 본녹산 일부를 제외한 송정,옥포와 금병산 기슭의 범방, 탑동, 분절, 미음과 봉화산, 천마산, 금개산 기슭에 있는 구랑, 압곡, 마음, 중곡, 가달, 생곡, 장락 등이 대부분 옛날엔 해안지대였다고 추정되며, 선사시대부터 이곳에 인류가 거주하였음 이 범방패총과 분절 지석묘, 가달 고분군 등을 통해서 증명되고 있다. 녹산면은 바다쪽의 녹산, 화전, 송정 3리이고 토야면은 산 안쪽의 범방, 탑동, 구랑, 소압, 미음, 상룡, 지사, 생곡, 중곡의 9리였다. 수조 34년 토야면은 태야면으로 개칭되었다. 1965년∼67년 녹산 간척공사가 시행되었다. 1978년 2월 15일 신호리가 명지면에서 이곳으로 편입 되었으며 1980년도에 부산∼진해간 도 로가 포장되었다.

요약하면 지금의 녹산동은 본래 토야면(태야면)과 녹산면 두 개의 면이 있었고 1914년 일제 때 두면이 녹산면으로 병합되었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조선조 숙종 36년(1710)에 작성된 김해부도와 영조 36년(1760)에 간행된 여지도서 의 김해도호부 방리조에서도 녹산이란 이름이 나오지 않고 다만 순조 32년(1832)에 간행된 경상남도읍지의 김해부 방리조에 「녹산면재부남오십리」라고 비로소 녹산이란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18세기 후반 19세기 초의 어느 시기에 태야면의 남부가 면단위로 편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진

녹산이라는 지명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먼저 녹산은 처음에는 녹산이었는데 녹산으로 고쳤다는 설이다. 즉 풍수설에 의하면 봉화산의 동쪽은 굶주린 사슴이 들판을 달리는 모양인 기록 주야형의 명단이기 때문에 녹산이라고 하였다고 하는데 오히려 녹산이라는 지명은 녹도에서 연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녹산이라는 지명에 앞서 녹도가 여지도서의 김해부지도상에 표시되어 있고, 조 선왕조실록 순조 11년(1811)의 염전 관계 기사에서도 명록양도라고 하여 녹도라는 지명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여지도서 단계까지는 조그만 일개 섬이었던 녹도가 계획되는 낙동강하구의 삼각주 발달로 인하여 서서히 육지로 변모되는 추세속에 놓여 있었으며, 19세기 초반이후는 비록 섬으로 기록되기는 하였으나 명지도와 더불어 염전이 상당히 성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미 육지와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녹도를 오늘날의 성산 앞에 있는 노적봉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한데 이곳은 염전이 행 해질 입지적인 조건이 되지 못하며 아마 노적봉은 당시 암초의 조그마한 섬이었을 것으로 볼 때 순조 때의 염전 기사에 보이는 녹도는 이곳을 기점으로 한 주변 일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여기에 녹산이라는 지명이 나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녹산을 현 녹산으로 표기된데 따른 전해져 오는 설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와 같이 녹산면은 퇴적층이 형성되면서 바다쪽의 녹산, 화전, 송정 일대를 관할하였고, 현재의 녹산 에 속한 봉화산 안쪽의 범방, 탑동, 구랑, 소압, 미음, 지사, 생곡, 중곡 일대는 본래 김해군 태야면 관할이었다.그러다가 1914년에 녹산, 태야의 두 면이 합쳐지면서 그 명칭을 녹산면으로 하고 면사무소는 구랑에 두었다. 그리고 1965∼1967년 녹산간척공사가 진행되었고 이에 따라 1978년 명지면에 속해 있던 신호리가녹산면으로 편입되었다. 그 뒤 녹산은 1989년 1월 1일 김해군에서 부산직할시로 편입되면서 강서구 녹산동으로 행정구역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방 이후 녹산면장을 역임한 인사로는 조규갑, 윤대용, 배종진, 박용개, 화대생, 홍혜연, 최정술, 조용가, 배종극, 김종하, 이운식, 김명영, 김계호, 이경우 제씨등이 있다. 녹산동의 면적은 50.42㎢로 광할하나 신호와 지사동을 제외하고는 전 지역이 개발제한구역에묶여 있는데 28개 자연부락에 29개 통, 79개 반이 있다.

담당자
문화체육과 / 문화관광계 (051-970-4064)
최근업데이트
2016-10-07
만족도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만족하십니까?

구정관련 건의사항 또는 답변을 원하는 사항은 강서구에바란다 코너를 이용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