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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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가락동

가락동의 지명유래는 문헌상 잘 나타나 있지는 않으나, 김해지리지에 의하면 가락이란 낙동수에 걸쳐 있다는 뜻으로서 큰 물가에 있는 지역임을 뜻한다. 500여년 전까지 무인도였던 가락에 죽도를 거점으로 민가가 이주하여 정착한 이후 김해에 예속되어 있다가 구한말 1895년 (고종 32년) 관제 개혁때 행정청인 김해군 가락면이 되면서 비로소 가락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명지동 지명유래
동 명 자연마을명 유 래
가락동 죽림 (竹林) 오봉산 동쪽 서낙동강 서편 연안에 자리한 옛 해창이 있었던 죽림은 가락의 중심지로 옛날 오봉산이 하나의 섬이었을 때 대밭이 무성하여 큰 홍수가 나면 이 섬이 바닷속에 떠 있는 대섬처럼 보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조선 예종때 경상남도지리지에 보면 둘레가 2.373보로서 좌우에는 바닷물이 연육하고 전답과 민가도 없는 무인도였다.
둔치도 (屯致島) 가락동 남단 서낙동강과 조만강사이에 60만평 규모의 섬에는 갈대밭이 무성하고 사람이 살지 않아 버려져 있었는데 100여년전 구 한말 웅천에서 몇가구가 이주해 와 자리를 잡았다일제 때 박간 농장이 강점하고 있어던 1935년 녹산 수문을 설치하면서 김해 평야에 큰 변혁을 가져오게 했는데 둔치도에도 농경을 할 수 있게 되어 여러 곳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논을 개간하여 자리 잡았다고 해서 둔치라고 했으며 먼저 개간한 위쪽을 상작이라하고 아래쪽을 하작 또는 남평이라고 한다.
고정 (古井) 오봉산 등뿔이에 해당되는 곳으로 호박샘이 있어 고정이라는 마을이 되었으며 성밑이라고도 한다. 김해읍지에 조선 숙종 18년 이 마을의 샘 우편 오봉산 기슭에 금파정이 건립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용등 (龍燈) 김해군 가락면 시절 죽림리에 소속되어 있던 자연부락으로 남쪽에 고정마을, 북쪽의 식만마을과 접하며 동하 들(죽림평야)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마을로서 옛날이곳은 용이 등천한 곳이라고 하는데 용같이 생긴 등이라고 마을이름이 용등으로 되었다고 전한다
식만 (食滿) 동쪽으로 서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강동동과 마주보고, 북쪽은 신어천을 경계로 김해시 불암동과 경계를 이루는 김해군 가락면 때의 식만리는 식만,시만,중사도 등 행정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시만 (詩滿) 식만 북쪽의 부마 국도변에 잇는 마을로 신어천사이로 김해시 불암동과 마주하고 있다. 대부분의 토질이 식만처럼 이루어진 비옥한 땅으로 농사가 잘 되며 근래에 와서 비닐하우스 영농과 화훼 원예재배로 소득을 올리고 있다.
중사도 (中沙島) 식만, 시만 마을의 동쪽 서낙동강의 한가운데에 있는 중사도는 옛날 홍수 때 모래가 쌓여 생겨난 섬마을로 딴치라고 불렸다. 이곳에서는 똑딱선으로 내왕을 했으나 1985년 새마을 사업으로 시만부락과 연결되는 교량을 건설하게 되었다.
죽동 (竹洞) 오봉산의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가락의 죽동리는 죽동1구, 죽동2구, 송산, 금천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죽동은 대변청이 있던 죽림보다 약100년쯤 먼저 형성된 마을로 대나무가 무성하여 죽동으로 불리워 졌고, 이 마을 동쪽 봉림으로 통하는 길목에는 돌틈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곳은 봉림, 죽림마을과 남포들을 개간할 때의 통로로서 주막이 있던곳이다.
송산 (松山) 옛날 덕지도라고 불렸던 마을로 김해~녹산을 오가는 도로측에 소나무가 많이 들어서 있는 독뫼산으로 송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독뫼를 똥매마을로 부르는데 이곳의 들은 토질에 염분이 많은 퇴적토라소채를 재배할 수 없어 쌀보리 농사에만 의존하면서 대부분의 청장년들이 부산 또는 김해공업단지에 취업, 통근 하고 있는 실정이다.
금천 (金川) 쇠내 또는 금천방이라고 불러온 마을로 송산마을의 북동쪽에 있어 김해시와 경계를 하고 있다. 철분과 염수가 끼어서 토질이 쇠처럼 벌겋기 때문에 금천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다.
봉림 (鳳林) 봉림마을은 옛날 가락면 봉림리의 본 부락으로 일직이 가락동의 토박이인 남평 문씨가 자리잡은 곳으로 문씨 종중재실인 경모재와 문위열씨의 아산재가 있어 전통적인 문물이 살아 있는 마을이다.
봉하 (鳳下) 죽도 최서단 양지쪽에 있어 양전이라고도 하며 봉하로 불렸다. 이곳에서도 1953년 김해농지개량조합에서 경지정리를 하기 전까지는 마을 앞 넓은 들이 저습지대라 갈대만이 무성하여 갈삿자리를 만드는 마을이었으나지금은 비옥한 농경지가 되어 있다.
신기 (新基) 죽림의 해창에서 고개를 사이에 두고 있는 신기마을은 인심이 떳떳하여 새터라 했는데 남쪽 벌을 바라보고 있어 남벌이라고도 불렀다.
통전 (統田) 통답으로 옛날 통제영소속의 땅이라 통전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겨났으며 이 지역에는 주민들이 여기 저기 인가를 이루어 흩어져 살고 있다.
대흥 (大興) 낙동강 일천식 공사 조성 이전까지만 해도 대흥마을은 사람이 살지 못하는 갈밭 저습지였는데 동쪽은 소발치, 삼치등, 서남쪽은 무영이 뽈치등 북쪽은 서포등으로서, 큰등이라불렀다
해포도 (海浦島) 구한말까지 이곳에는 갈대와 억새풀이 우거져 있는 저습 섬이었으나 일제초 일본인 박간농장이 들어서고 농장한이라고 불렀다. 이곳의 지주였던 일본인 박간일남과는 소작료 과다수탈로 쟁의가 끊임없이 일어나 지방인심이 일본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찬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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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업데이트
2017-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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