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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대저1ㆍ2동

대저도는 원래 경상남도 양산군 대상면, 대하면 지역으로 서낙동강 어귀에 큰 모래톱으로 형성되어 있었으므로 대저 지명이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대상면은 대저도의 위쪽에 위치하여 출두리, 사덕리, 대지리, 평강리를 관할하였고 대저도의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는 대하면은 소덕리, 덕두리, 도도리, 맥도리, 울만리를 관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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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1동 지명유래
동 명 자연마을명 유 래
대저1동 신덕 (新德) 김해군 대저면때는 사덕리에 소속된 부락으로 국도가생긴뒤 사덕상리에서 나뉘어 졌고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신사덕이라 하다가 신덕으로 이름을 바뀌었다
상리 (上里) 낙동 제방을 쌓기 전에는 강변 기슭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제방축조후 현재의 위치로 이주하게 되었다. 사덕이란 지명은 모래가 많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며 상리는 사덕의 위쪽에 있는 마을로 붙여진 이름이고 옛날에는 정금이라 했다
장로 (長路) 1933년 강서지역에 큰 변천을 가져온 낙동장교가 개통되면서 다리와 이어지는 새로운 긴 도로가 개통되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신장로이다 이렇게 부르기 이전에는 지금의 낙동장교에서 200m북쪽에 구포로 건너가는 나루터가 있었으므로 나릿가 라고 불리기도 했다
번덕 (繁德) 현재의 낙동제방을 쌓기 전에는 지금 낙동강물이 흐르는 중심부까지 모래가 쌓여 뭍을 형성해 몇 채의 가옥과 정미소가 있었다. 어느 해 큰 홍수를 입어 이곳의 모래를 많이 쓸어 갔으나 많은 잔디가 덮여 있던 곳에는 홍수의피해가 적어 큰 덕을 보았다 하여 수덕 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한다. 옛날 박씨들이 처음 정착했다하여 박씨촌이라고도 부름
당리 (堂里) 위치하는 지대가 대저도에서 제일 높은 곳이어서 당말리라고 불렀는데 당산이 먼저 세워진 유래로 말미암아 당리라는 이름이 되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신촌 (新村) 당리부락 배수로 건너편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신촌은 출두리에서는 가장 늦게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동연정 (東淵亭) 옛날 이곳은 홍수때 마다 강물이 범람하여 물길이 한 곳으로 세차게 맴돌며 모래를 쓸어 버려 큰 못을 이루었는데 이 못가에 정다를 짓게 되어 이곳을 연정이라 부르게 되어 동쪽은 동연정 서쪽은 서연정이라 한다.
서연정 (西淵亭) 농지개량조합대저양수장 용수로 서쪽이 서연정마을이다. 일제시대에는 이 용수로 둑길을 따라 몇채의 집이 있었고 수도작과 밭농사 경작을 하며 살았으나 점차 모여 든 사람들로 제법 큰 마을로 성장하였다.
대지상리 (大地上里) 낙동강 평야의 넓은 땅에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대지리란 이름이 붙여 졌으며 대지리에서도 높은 쪽에 위치한 대지상리는 이 지역에서 제일 먼저 형성된 가장 큰 마을이다
중촌 (中村) 대리상리에서 하리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길게 뻗어있는 마을로서 대지의7개부락 가운데 중간쪽에 위치하고 있어 중촌 이라 한다.
중리1구 (中里1區) 1885년 대홍수가 나기 이전까지는 현재의 서낙동강 강바닥자리에 중리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으나 잦은 홍수로 부락은 강으로 변화면서 모래를 밀어붙인 자리에 다시동네를 이룬 곳이 지금의 중리마을이다
중리2구 (中里2區) 이마을은 옛날 서낙동강이 평강천으로 굽어지는 어귀가되어 모래밭과 갈대만이 우거진 갈밭이어서 갈밭마을이라 불렀다. 당시에는 쓸모없는 모래땅으로 거의 불모지 였으나 주민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옥토로 만들어 지금은 고등채소를 재배하고 있다
대지하리(大地下里) 1865년 여름장마로 대홍수가 났을때 밀려내려온 모래가 쌓이면서 언덕받이가 생겨 여기에 새로운 마을을 이루었는데 이마을을 ‘모래각단’ 이라 불렀고 이곳이 오늘날의 대지하리 마을이다 대지하리는 대지의 아래쪽에 위치하여 ‘아래각단’ 이라고도 불렀다.
평강상리(平江上里) 국도14호선과 농지용수로가 마주치는 곳으로부터 동남쪽에 위치하며 옛날에 뽕나무가 많아 상목리라 불렀고 평강리 가운데 가장 위쪽에 있는 평강상리로 공군부대로 향하는 길과 중리2구, 그리고 부산교도소가는길이 연결되는 길목이어서 몇몇상점들이 있다.
평강대리(平江大里) 국도14호선에 평강변을 따라 비행장후문으로 가다보면 길이 옛길과 큰길 두갈래로 갈라지는데 그 기점이 되는 곳에 대리마을이 있다 옛날에는 이마을 둑길에 포구나무가 줄지어 있어 포구나무각단일고도 불렀다
평강사리(平江沙里) 평강천의 잦은 홍수로 이곳에 모래가 쌓이기 시작하여 모래톱을 이루어 갈대만 무성히 자라고 있던 땅을 개간한지 20년이 지났다 평강양수장의 용수로 들길을따라 자리잡은 평강사리 마을은 해방당시 대나무와 탱자나무 울타리로된 초가집이 옹기종기 이웃하고 있었던 평강리의 가장 큰 마을이었다.
평강하리(平江下里) 사리의 남쪽 평강천가에 있는 마을로 평강리에서 제일 아래쪽에 위치한 평강하리는 김해국제공항에서 이.착륙하는 비행기의 굉음소리에 하루해가 가는 마을이다.
칠점 (七點) 평강하리 동쪽에 위치한 칠점마을은 오랜 옛날 바다속에7개의 산언덕으로 바닷물이 산허리까지 수위가올라 봉우리 만이 7개의 점을 찍어 놓은 것 같이 보였기에 침점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것도 대저도가 뭍으로 변하는 역사와 그때를 같이 한 것으로 본다
신정 (新正) 신정마을은 대저동에서 서낙동강 건너편 김해군 대동면 초정리에 위치하고 있으나 행정적으로는 대저1동121-204번지 30통에 소속된 대동면 속에서 대저땅이 된 마을이다.
대저2동 지명유래
동 명 자연마을명 유 래
대저2동 등구 (登龜) 낙동장교에서 제방을 따라 남쪽으로 3㎞쯤에 형성되어 있는 등구마을은 대저1동과 대저2동의 경계지점으로써 옛날 바다에서 서낙동강물을 거슬러 거북이가 가끔 기어올라 왔다고 등구막이라고 했다고 하여 옛날 등구나무 숲이 둘러 싸여 있어 등구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설도있다.
신소 (新蘇) 등구마을을 지나 공항 입구까지 공항로를 따라 잇대어 있는 곳에 신소마을이 있는데 조국광복과 더불어 새로운 큰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여 신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소덕 (小德) 공항로 남쪽과 용수로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소덕하리는 약200여년전 부락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오랜세월 김씨와 이씨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으며 이제는 농촌지대에서 변모하여 차츰 도시화 되어가는 마을이기도 하다
신흥 (新興) 공항에서 남쪽으로 진해~부산간 도로를 따라 대저중학교 입구까지 용수로 동편에1960년대에 형성된 신흥마을이 있다. 해방 후 일본 · 만주 등지에서 귀환한 동포들이 현 김해국제공항 자리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아 왔는데6.25사변이 나자 공군비행장 확장으로 그 곳을 떠나 현 위치로 정책이주하게되어 새로운 부락을 이루었다.
용두 (龍頭) 용머리 형태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뜻으로 용두라는 명칭이 붙었다. 일제말기 공군비행장 확장공사로 사두본리의 철거민 30여호와 8.15이후 귀환동포가 이곳에 이주하여 형성된 마을이다.
사두 (沙頭) 200여년전 마을이 처음 형성되었을 때는 양산군 대하면 모래언덕의 머리가 되므로 사두리가 되었다. 북쪽에는 새핀들, 농막들, 동북쪽에 시비기들, 서쪽에는 서들이 있고 서간선수로가 있었으며 서들 밖은 태구라고 했다.
상방 (上芳) 대저2동사무소에서 버스길을 따라 공항쪽으로 가다 보면 소덕하리를 지나서 상방마을이 나타난다. 상방은 상등을 고친 이름으로 1920년대 형성된 마을이며, 온들녘에 크로바꽃의 향기에 덮여 있어 상방이라는 마을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덕두 (德斗) 덕두리는 덕두본리.동방.금호의 3개 마을로 되어 그 중 가장 일찍 개간된 마을이 덕두본리부락이다. 이곳에는 조선후기 용동궁에 속하는 둔전답과 노전이 있었고 또 행창위궁의 둔전답도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동방 (東方) 동방마을은 1953년에 덕두본리의 동남쪽30여호가 분리하여 형성되었다. 분리당시 연안 이씨가 대부분이었으나 지금은 50호의 가구 중 이씨는 몇집 되지 않고 계속 이주해 온 각 성씨로 이루져 있다.
금호 (錦湖) 제3낙동교에서 부마 고속도로의 톨케이트 북쪽에 큰 소나무와 작은 소나무가 들 가운데에 어우러져서 있고 남쪽에는 은빛나는 비단을 깔아 놓은 듯 맥도강을 바라 볼 수 있는 곳이금호마을이다.
본맥도 (本麥島) 맥도리는 본맥도. 작지. 염막. 송백. 장협. 동자등 6개부락이 있는데 이중 본맥도는 맥도리 북쪽 부마고속도로 남쪽에 위치하여 맥도강을 사이에 두고 금호마을과 마주보고 있다.
작지 (作之) 원래 섬으로서 마을 형성이 100년 전후로 처정되며 작지는 ‘짝지‘로 불렀는데 용수로를 따라 길게부락이 형성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현제 120가구에 230세대가 살고 있으며 주민의 3분의 1가량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3분의 2이상은 사상공단의 근로자와 택시 기사들이다.
염막 (廉幕) 염막은 발을 많이 생산한 발막섬과 염전이 있었던 염밭섬이 합쳐 생겼다. 작지 부락 남쪽 진부선 국도를 따라 송백까지 뻗어 있는 맥도의 끝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마을이 염막1구이다.
동자,장협(東子,長峽) 동자도는 대홍수때 동자가 떠내려 와서 살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며 동자도의 장협은 갈밭으로 된 좁고 긴섬이라는 뜻이다.
송백 (松柏) 대홍수로 제방이 무너졌을 때 큰 소나무 한 그루가 떠 내려와 이곳에 뿌리를 박고 자랐다하여 송백마을이라 이름지어졌는데 상송백, 하송백으로 나눈다. 맥도 끝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1920년대에 갈밭을 개간하여 전답을 일구었으나 대홍수로 폐허가 되었다가 1934년 제방을 쌓아 안전지대로 형성된 때는 30호 가량 살았었다.
신노전 (新蘆電) 강으로 경계를 이루는 명지동, 강동동, 대저2동을 연결해 주는 신노전은 새갈밭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약 70여년 전 신노전에서 가락면과 제도와 명지동 순아도를 왕래하는 나룻배가 개설되어 있었다.
신평 (新平) 울만리는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설만리 사두리 일부와 덕도면의 이울과 설만의 병합 그 이름을 따서 울만리가 되었는데 신평, 입소, 설만, 정관등 4개 마을이 있다.
입소 (立召) 입소마을은 공군비행장의 서쪽과 설만부락의 서편에 위치하여 강동동과 신평마을을 사이에 두고 있는 마을이다. 2차대전 후 입안청마을과 소용포마을이 합쳐서 한마을이 되었으므로 두 마을을 이름의 첫 글자를 따서 입소 마을이라 하였다.
설만 (雪滿) 김해군 대저면 대 울만리에는 설만부락이 가장 먼저 형성되었고 으뜸가는 마을이었다. 옛 이름은 희만이라 하였는데 이는 행운이 담긴 즐거움이 깃든 마을이란 뜻을 지니고 있고 설만은 가장 낮은 지역이므로 눈이 올때는 적설량이 많아서 생긴 이름이다
순서 (順西) 부마고속도로를 축으로 월포의 북쪽이 순서마을로서효자의 전설에 따라 순정이라고 했다.순계섬과 서간도가 개울을 사이에 두고 형성돼 오는 동안 두 마을 가운데 있는 큰 개울을 중심하여 하나로 통합한 후 두 마을의 앞 글자를 따서 순서라 했다. 100년 전에 몇 사람이 갈밭을 개간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고 한일합방 이후에 일본인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도도본리(桃島本里) 본래 도도리는 9개 마을(상리, 내리, 서호, 월포, 상납청, 신방, 순서, 군라, 신노전)이었으나 현재는 6개 마을(본리, 상납청, 월포, 순서, 군라, 신노전)로 되어 있다. 웃각단인 상리와 상리 서쪽의 서호부락은 공항건설 때 없어졌고, 신방은 순서에 병합되었으며 상리에 남은 몇집과 안각단인 내리를 합쳐서 도도본리가 되었다.
상납청 (上納廳) 부마고속도로가 대저2동을 가로질러 가는데 동편은 월포마을이고 서편이 상납청이다. 100여년전 몇 사람이 뜻을 같이하여, 갈밭을 개간하여 살았는데 한일합병 후 일본인 중부기차랑이 본격적으로 개간하여 전답을 일구어 마을이 이루어졌다.
월포 (月浦) 대저2동을 관통하는 부마고속도로 남쪽을 구분하여 길게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 월포다. 맥도강에 이어 져 지형이 마치 반달같이 생겨 경치가 좋았으며 월포와 맥도 장협을 연결하는 포구가 있어 땅이 반달같이 생긴 포구란 뜻으로 월포라는 이름이 생겨났고 옛날에는 월포~맥도~장협에는 이 왕래하고 있었다. 포구는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20년전에 없어져 버리고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군라 (軍羅) 조선조시대 낙동강 하류지역을 지키는 군막이 있었던 곳이었다. 군라는 군관청과 황라도 두 마을을 통합해서 생긴 것으로 명칭은 이두 마을 이름을 첫 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군라부락의 부분은 유풍도라 하여 당초엔 월포마을에 속해 있었으나 행정상 불편이 많다는 주민들 요청에 의하여 10여호가 군라에 편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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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저 1, 2동이 위치하고 있는 대저도는 동서로 6km, 남북으로 15km, 넓이 48.1km²인 큰 섬이다.

낙동강 하구에 형성된 삼각주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북구의 구포와 화명동, 덕천동, 삼락동, 감전동, 엄궁동과 마주보고 있으며 남쪽에는 명지동과 접하고 북쪽에는 서낙동강을 경계로 하여 김해군 대동면과 마주 대하고 있다. 대저동의 평지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시작했는지 정확한 자료가 없다. 가야시대 왕도였던 김해의 일부 지역은 농경이 시작되고 소수의 초막이 들어섰을 가능성은 있으나 대저동은 대부분 모래뻘로서 갈밭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야 문헌자료에 노전을 비롯한 전답에 관한 기록과 농토를 보호하기 위한 제방축조의 기록이 나오고 있다.

대저도는 원래 경상남도 양산군 대상면, 대하면 지역으로 서낙동강 어귀에 큰 모래톱으로 형성되어 있으므로 대저 지명이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대상면은 대저도의 위쪽에 위치하여 출두리, 사덕리, 대지리, 평강리를 관할하였고 대저도의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는 대하면은 소덕리, 덕두리, 도도리, 맥도리, 울만리를 관할하였다. 이렇게 조선시대 양산군에 오랫동안 소속되어 오다가 조선조 광무 10년(1906) 9월에 경상남도 김해군으로 편입되었다. 이로서 유사 이래 양산 땅으로 양산사람이 살던 대저도는 김해 땅이 되어 김해사람이 된 셈이다. 그 후 1914년 대상면과 대하면을 합하여 대저면이라 칭하게 되었다. 당시 김해군 대저면에는 10개의 행정리와 45개의 마을이 있었는데 그 리명과 마을은 다음과 같다.

대저면 10개의 행정리와 마을이름
출두리 ― 당리, 신촌, 번덕 덕두리 ― 금호, 본리, 동방
사덕리 ― 신장로, 상리, 신덕 대지리 ― 동연정, 서연정, 상리, 중촌, 중리1구, 중리2구, 하리
사두리 ― 용두, 사두, 본리 도도리 ― 상납청, 내리, 본리, 서호, 군라, 신노전 순서
소덕리 ― 하리, 신소, 등구, 신흥, 상방 평강리 ― 상리, 대리, 사리, 하리, 칠점
울만리 ― 신평, 입소, 설만, 정관 맥도리 ― 본맥도, 작지, 동자도, 염막, 장협, 송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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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도 사람들은 구한말까지 양산군에 소속되었을 때 양산땅으로부터 김해땅이 되는 것을 한결같이 바라고 있던 처지였다. 왜냐하면 김해는 신흥 부산에 인접한 지방도시로 모든 분야에서 활기있게 발전을 하고 있었으므로 당시 김해군에 편입되었다는 것은 대저동이 농업지역으로 전환하는 속도를 빠르게 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 변천한 가운데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1905년을 전후하여 한반도를 잠식해 들어온 일본인들이 비옥한 충적토 지대이던 김해 삼각주에 눈독을 들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 곳 대저에 건너 오는 일본인의 수가 매년 늘어나다가 일제가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한 뒤로는 자금을 풀어 많은 일본인 농부들을 우선적으로 대저면 출두리에 이민시키고 낙동강에 제방을 쌓아 이곳에 개간 사업을 벌였는데 특히 출두리에는 배 과목을 많이 심어 대량으로 구포역을 통하여 각지로 출하하였다. 이 배는 일본은 물론 멀리 동남아를 비롯한 해외까지 수출되어 나갔고, 과수원은 대지리까지 확장되었는데 대저면 출두리 배는 '구포 배'라는 이름으로 명성을 날렸던 것이다.

그러나 대저도의 주농업은 벼농사였다. 기름진 삼각주 평야에서의 쌀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일은 오래전부터의 숙원사업이었으나 천수에만 의존하는 원시적 농법으로는 쌀을 제대로 생산할 수 없었으므로 1916년 대저 수리조합의 창립을 보게 된 것이다. 이때의 몽리면적은 1,970정보였고 조합원수는 160인이었는데 1962년 농지개량조합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몽리면적도 3,021정보에 이르렀다.

이렇게 날로 발전하여 온 대저면은 일제시대부터 읍으로 승격되기를 기대하여 왔는데 8·15해방이 되고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 운동이 본격화되어 경상남도에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중 6·25동란으로 무산되었다가 1973년 3월12일 대통령 제6543호로 읍승격이 공포되고 그해 7월1일을 기하여 대망의 대저읍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5년후 1978년 2월15일 부산직할시에 편입되어 북구에 소속되었다가 1983년 5월1일 부산직할시 강서출장소가 설치되어 대저1동이 30통 129반으로 편성되고, 대저2동이 26통 90반으로 편성되어 직할시민이 되었으며 1985년 1월 1일 강서구로 출발한 행정 구역에 속하게 되었다. 지난날 대저읍 사무소(대저1동 2376-5) 건물을 대저동 사무소로 사용하다가 현재 강서구 청사로 사용되고 있으며 1989년 1월4일 대저1동 2377번지에 대저1동 사무소를 신축 이전하였고 대저2동 사무소는 대저2동 1938번지에 신축하였다.

대저도에서 가장 먼저 생긴 마을이 덕두리라고 한다. 구 제방안의 지면이 솟은 언덕에 있었는데 이 곳은 배를 대는 중요한 나루터로서 양산군 대저도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 곳이었으며 동래군과 마주하고 있었으나 큰 홍수로 마을 전체가 유실되어 버리고 새로 쌓은 제방 서쪽인 안전지대로 옮겨 마을을 형성한 것이 현재의 덕두리이다. 이 덕두리를 중심하여 농토가 개간되어 농가수가 늘어남에 따라 이곳 저곳에 차츰 새로운 마을이 들어서게 되어 덕두리라는 원명을 따서 사두리, 출두리, 사덕리, 소덕리 등의 마을이름이 나오게 되었다. 옛날 모래가 쌓여서 언덕이 되어 배를 댈 수 있는 곳을 덕달이라고 하였는데 덕두리라는 마을명칭은 바로 이 덕달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마을 명칭에 있어서 두(頭)를 간략한 두(斗)로 바꾸어 쓰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인데 덕두리(德頭里)도 현재 덕두리(德斗里)라고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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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저동에는 홍수를 막기 위해 축조된 낮은 제방이 현 낙동강의 강류 중간지점에 남북으로 길게 있었으나 이 때의 제방은 현재의 제방을 축조할 때 그 토량을 사용하여 대부분 없어졌지만 북쪽 당리에서 평강리에 이르는 부분은 아직도 그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편인데 이 제방은 조선시대 대저도의 농지와 농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양산군의 지원 아래 농민들이 자력으로 축조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한편, 낙동장교가 가설되고 부산에서 김해쪽의 국도가 1935년에 완공되자 도로변에는 소시가의 성격을 띠고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과실과 채소의 명산지일 뿐만 아니라 도작의 본산이 되었으며 인구가 날로 증가하고 농업이 발전하면서 대저면에도 정기시장이 서게 되었다. 대저장은 1일과 6일, 덕두장은 4일과 9일에 열렸다. 이 시장은 지방주민의 일상 경제 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제시대 비교적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였던 대저면에는 해방 후 철수하는 일본인이 두고 간 과수원이나 농지가 많았다. 이 재산들은 해방 후 적산관리청을 통하여 이 곳 농민들에게 분배되었고 일반농지도 농지개혁법의 시행에 따라 직접 농사를 짓는 농민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어 소작농민들이었던 대저면민들이 대부분 지주가 되었다. 또한 대저동에는 세계제2차대전 중 현 김해국제공항 자리에 일본 해군비행장이 건설되어, 그 때는 연습기 몇 대가 보였을 뿐 제대로 비행장 구실을 못한 채 종전이 되고 말았다. 일제가 이곳에 군용 비행장을 건설할 당시 부산형무소의 재소자들과 경남 각 지방에서 강제 징용한 사람들과 또 이곳 지방민을 강제동원하여 노역에 종사케 하였다. 그러나 6·25동란 중 이 비행장은 군사비행장의 중요한 기지로 사용하여 대저동의 상공에는 비행기의 굉음이 그칠 날이 없었다. 잊지 못할 일은 1952년 2월 22일 상오 대저 상공을 비행중이던 연합국 제트비행기가 고압전선에 부딪쳐 사덕리의 현 김해농지개량조합 대저출장소 건물에 추락하는 대참사가 발생하였는데 이 사고로 조합 건물이 파괴되고 집무 중이던 직원 7명이 순직하는 등 1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때 이 조합의 명칭은 대저수리조합이었다. 이런 갖가지 우여곡절을 겪던 군사비행장은 1976년 민간여객을 실어 나르는 국제공항으로 변모, 현재는 국제수준의 공항시설로 정비되어 있다.

대저동의 대저면 시절의 역대면장은 일제시대 윤정희, 김봉수, 고광열씨가 역임하였고 해방 후에는 윤기은, 김영현, 조돈찬, 김상석, 안효덕, 이원조, 이준달, 박양우, 김종갑, 송태복, 윤용조, 이강선, 박정오 등 제씨였다. 1973년 대저면이 읍으로 승격 읍장에는 장학봉씨가 부임하였다가 1978년 강서지역이 부산직할시로 편입 북구 대저1, 2동으로 개편되었고 1989년 다시 강서구소속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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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체육과 / 문화관광계 (051-970-4064)
최근업데이트
2017-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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